전주 한정식을 되찾자
전주 한정식을 되찾자
  • 안도 문학평론가
  • 승인 2020.11.2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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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는 한때 대한민국 음식의 수도라고 불리워졌다. 따라서 전주는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식 창의 도시’에 선정되었다. 조선 3대 음식으로 꼽히는 궁중 음식에서 유래하였다는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을 넣은 콩나물국밥은 꼭 먹어야 할 음식이다.

  전주 음식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음식재료의 특성을 들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그 맛이 독특한 전주 10미는 이들 대부분이 음식의 재료로서 전주 음식이 타 지역과 차별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고 있다. 전국적으로 명성이 알려진 전주음식들은 모두 이들 10미를 이용한 것으로 음식재료의 차이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어울려져서 만들어 낸 작품이기 때문이라 평가된다. 전주 10미는 기린봉 일대의 열무, 교동의 황포묵, 신풍리 애호박, 서낭골 파라시, 소양 서초, 삼례 무, 한내 게, 남천의 모래무지와 함께 선너머 미나리, 교동 콩나물을 일컫고 있다.

  전주 한식의 역사를 보면 전주의 가정식 밥상은 역사적 전통이 강한 반면, 콩나물국밥과 콩나물 비빔밥은 조선후기 시장경제가 활성화하면서 전주난장에 생겨난 것으로 200여년의 역사에 지니고 있다. 전주의 가정식 백반을 일제시대에 상품화한 것이 한정식이다.

  한식 백반을 상품화한 것이 한정식이다. 한식 백반집과 한정식이 전라감영이 자리하였던 구 전북도청 주변에서 성업하고 있는 것도 전주시대 전주관아의 아리들의 입맛이 한식 백반집을 집성하게 된 동기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전주의 아리들은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들이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는 곳이 전주이고, 그 주체가 전주 아리들의 가문이었다. 아리들은 고려시대 향리집단의 전통을 가진 전주의 향촌 지배세력으로 권세를 유지하는 집단이었고, 조선시대 중앙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방 관리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지만, 전주의 아리들은 향촌세력의 전통을 유지한 토호 집단이었다.

  지방 토호들은 가문을 유지하면서 학문적 지적 능력을 갖춘 지방 엘리트들이다. 그 지방 엘리트층이 선비 집단에 속했다. 조선시대 선비 집단은 지방 문화를 유지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판소리도 이러한 아리들의 문화였지 농민들의 문화는 아니었다.

  백제 왕통의 전통은 고려시대 향촌 지배세력으로 승계되었고, 조선시대 아리집단으로 가문의 혈통이 유지되었으나 조선후기에 토호기반이 몰락하면서 가정식 백반도 빛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조선후기에 전주 남문 밖 시장이 흥성하면서 그곳에서 콩나물국밥과 콩나물비빔밥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17세기말 전주 남부시장에 시전이 발달하면서 전국 8도의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점포는 남문 밖에서 서쪽으로 다가동까지 조성되었고, 거의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의 기능을 하면서 시장음식으로 콩나물국밥과 콩나물비빔밥이 호황을 누렸으며 한정식도 활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요즈음은 역사로 사라지며 한정식 식도락 여행지가 광주로 바뀐 지 오래다. 전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모모한 한정식집은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광주 한정식 맛집, 한정식 가족회관 등이 한정식 정통을 잇고 활기를 띤지 오래다. 하지만 전라북도 한정식집은 퓨전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데도 관계자나 당국은 모르쇠다. 한정식의 본고장은 언제나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대로 사라지는 것일까?

안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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