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의 고장 ‘장수’
절의의 고장 ‘장수’
  • 전일환 시인
  • 승인 2020.11.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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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 2 <16>장수
몸을 던질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장수에 가면 임진왜란 때 장수현감인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으로 간 논개가 떠오르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부군을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한 논개를 기리기 위해 지은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祠)가 생각난다.

 

 ■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논개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제전을 벌이고, 이 날을 ‘군민의 날’로 정하여 다채로운 행사와 더불어 논개를 기리는 대제(大祭)를 지낸다. 논개는 선조 26년 임진란 때 진주성 방어로 떠나는 장수현감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갔고, 부군이 순절하자 남강 촉석루에서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남강의 그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칭했고, 그를 기리는 사당을 의암사(義巖祠)라 일컬었다.

논개의 충렬을 변영로의 시집 ‘조선의 마음’에 담아낸 시에서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 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라는 논개의 불타는 충렬이 형상화되어 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어느 가수가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내려간 그 푸른 물결위에 ~라고 열창했던 노래가 떠오른다.

 

■쌍무덤 순국의사 전해산 의병장

장수읍에서 번암면 유정리 산길 따라 좁게 나 있는 도로를 한참을 오르내려도 오가는 차 한 대 마주하지 않는 한적한 길이다. 이곳에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 손을 하늘 끝에 닿을 듯 치켜든 의병장 전해산 장군이 왼손에 화승총을 든 동상이 서 있고, 뒤에는 산(山)자형의 전해산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라운지엔 의례 장군의 흉상과 일상적인 안내도가 길을 인도하듯 걸려있어 탐방객들을 맞고 있고, 옆 의자에는 선비차림의 영정(影幀)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장군은 고종 16년(1879)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에서 출생하였다. 원 이름은 기홍(基泓)이고 자(字)는 수용(垂鏞), 호가 해산(海山)이다. 어릴 적에 장수군 번암면으로 이사한 뒤,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후에 호남창의회맹소 종사관, 창의동맹단 참모를 거쳐 대한제국 참위출신 정원집과 합류하여 대동창의단 의병장으로 70여회 이상 일제군경과 전투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권으로 1909년 순종의 의병해산령이 내려지자,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기고 남원 고대산에 숨어들어서 서당을 열고 후진을 가르치다가 왜경에게 체포 구금되어 이듬 해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대구감옥소에 이감되었다. 7월 18일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장례를 치루기 위해 상여가 장군의 고택에 이르자 부인인 김해김씨도 극약을 먹고 자결함으로써 쌍 상여 장례를 치룬 순국열사였다고 소개되고 있다.

 출생으로부터 순국에 이르기까지 장군의 의병일생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따라 생생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의병(義兵)이 무엇이며, 이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왜 싸웠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반추(反芻)토록 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자필 한자로 쓴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과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의 휘장이 걸려 있어 선공후사했던 장렬(壯烈)한 선열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참다운 선사(先師) 백용성 독립운동가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는 죽림정사와 백용성 조사(祖師)의 생가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생각 외로 웅장하게 보인다. 백용성 선사는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나 14세에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 하였다. 부모의 끈질긴 만류로 귀가했다가 16세에 다시 합천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하여 수도를 하였다. 본디 호국불교인 해인사의 입산은 기울어가는 미래조선의 장래에 대한 우국의 첫걸음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선사는 1911년 상경한 뒤 4월에 종로구 북익동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본격적인 불교의 대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대각(大覺)운동은 ‘내가 먼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는 게 핵심이며 그래야만 불교의 대중화를 꾀할 수 있고, 조선 500백년간의 억불숭유정책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중생과 괴리된 산중불교에서 속세로 파고드는 혁신이고 왜국의 침탈을 막아내는 첩경이라고 생각한 결과다.

그러므로 대각운동의 본원인 대각사는 대중불교, 호국불교의 전통을 잇는 포교소요, 수행의 강학(講學)소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 등 불교계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백용성 선사(禪師)와 숙고 논의하는 참다운 선사(先師)이시다. 이로써 독립선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이 되었다. 또한 출옥한 뒤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불경의 한글화번역작업에 몰두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을 쏟았다. 한편 불교사원경제의 혁신운동으로 불교의 선과 농사가 일치해야 한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1940년 2월 24일 입적하는 날까지 오로지 민족과 조국을 위해 현실에서 벗어난 산속불교로부터 일제치하에서 압박받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세상불교로의 환속(還俗)을 주장해 온 선사다운 승려였고, 광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애족의 독립선사로 남아 있다.

 
  #천우(天佑)의 건재(健齋) 정인승 선생

장수읍에서 전주나 대전, 함양으로 가는 길을 지나 한소끔 달리면 곧바로 계북(溪北)이 나온다. 여기는 국어학자인 정인승이 나고 자란 고장이다. 이곳에는 그분의 생가가 있고, 건재 정인승 기념관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기념관에는 “겨레나 나라를 떠난 개인이 없으며, ‘큰 나’를 위한 ‘작은 나’의 희생은 영원한 것, 요행이 아닌 주체정신으로 허영을 버려야 한다”는 글이 남아 있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건재 선생은 학자이자, 불굴의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 큰 영향을 받아 한글연구에 진력하였다. 졸업한 이후엔 고창고보 교사로 종사하다가 사직하고 1936년에 조선어학회에 가입한 후 민족적 대사업인 조선어사전 편찬에 몰두하였다. 이듬해인 6월에는 ‘한글’지 발행을 주관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외래어표기법 등 우리말을 체계화하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 결과 말은 민족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며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로써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다’라는 어문(語文)민족주의적 철학으로 국학연구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이라는 사명감을 갖게 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새벽 정인승선생이 종로서에 연행되었다. 이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취조를 받고, 모진 고문과 구타를 이기지 못하고 강제로 ‘위반’했다는 허위자백을 하였는데, 그 때 왼쪽 청력을 잃어 평생 어렵게 살아 왔다. 왜놈들은 조선말 편찬사업은 한낱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할 뿐, 한글강습소를 한답시고 전국을 돌며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불어넣어 독립운동을 했다고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의 침략사이다.

정말 우리 조국은 ‘실낱만치도 볕’이 들어오지 않는 감방처럼 광복은 아득하기만 한 현실이 어둡고 안타까웠다.

장수에가면 여장부 격인 논개를 비롯하여 전해산 장군이 죽자 함께 자결한 의기로운 부인을 다시 생각케 한다. 독립운동에 앞장 선 백용성선사. 또한 청력을 잃어가며 내 나라의 뿌리를 지킨 건재 전우 정인승선생 전성범 의병장을 비롯한 많은의병장들. 모든 게 모호한 이 시대의 우리에게 뼈아픈 아픔과 통찰을 던진다. 선조들이 뿌린 핏물이 과연 지금도 흐르기는 하는 것인가.

 전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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