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북문학기행> 17. 진북동의 골목을 헤메던 아이의 눈길 - 이민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2020 전북문학기행> 17. 진북동의 골목을 헤메던 아이의 눈길 - 이민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 이휘빈 기자
  • 승인 2020.11.15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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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북초등학교에 가을이 무르익어 있었다 / 이휘빈 기자
진북초등학교에 가을이 무르익어 있었다 / 이휘빈 기자

전주시 주민들에게 경원동은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라기보다는 금융과 쇼핑, 관광지로 떠오르는 곳이다. 빌딩과 상가로 얼룩진 경원동에서 남부시장을 거쳐 진북동으로 내려오면 세월을 머금은 주택들의 지붕과 대문들이 얼키설키 피어 있다. 진북동에 대형 아파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이로 스며 있는 작은 골목길들을 거닐면 옛 전주의 모습이 넌지시 겹쳐진다.

시인 이민하는 전주 출신이다. 전주 평화동에서 태어난 이후 잦은 이사를 겪은 시인은 그 흔적을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에 실린 시 ‘피아노’에 담았다. 본문 두 번째 줄 “학년이 바뀔 적마다 학교가 바뀌었으므로 나는 자주 길을 잃었어”라는 표현은, 시인의 어린 시절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치다.

이어 “친구들은 여전히 파란 대문 앞에 모여 고무줄을 뛰고 외떨어진 술래처럼 진북동까지 잡아늘이던”이라는 문장부터, 시인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점차점차 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방과 후 턴 빙 운동장을 맴도는 내내”라는 부분을 통해 시 속의 어린 소녀가 텅 빈 운동장을 오래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가을이 무르익는 11월, 진북초등학교와 그 일대 작은 마을들은 햇볕을 한껏 머금은 나뭇잎들이 꾸미고 있었다. 간혹 주민들의 발자국 소리를 빼면 진북초등학교는 가을이 서성이는 소리들로 풍성했다. 운동장을 헤매고 골목을 거닐었던 소녀도 오후의 가을 풍경에서 쓸쓸함을 배웠을 것이다.

이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잦은 이사와 전학을 다니면서 낯설고 불안했던 유년의 경험을 모티브로 했다”고 밝혔다. 또한 시인은 시집 ‘세상의 모든 비밀’에 실린 ‘화양(華陽) 시절’을 소개했다. 시인에게는 화양동이 서울에서의 고향인 셈이다. 

시인은 “사랑하던 강아지와 가족들이 먼저 서울로 왔고 초등학교를 마친 저는 전학 문제로 수개월을 혼자 떨어져 사촌언니 집에서 지냈는데 그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심해서 몰래 울곤 했다”며 “이후 화양동 집에 합류하게 됐는데 가족으로서의 충만감도 잠시, 다시 이사를 간 이듬해에 강아지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 집에서는 엄마가 떠났다. 그 짧았던 화양동 시절이 가장 빛나고 완전했던 ‘화양(華陽) 시절’이었다”고 또 하나의 추억을 소개했다.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시인은 서울에서 더 많은 생활을 했지만 그렇다고 전주가 잊혀진 고장은 아니었다. 이민하 시인에게 전주는 불안과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모태와 같은 공간이었다. 이 시인은 “책과 음악을 좋아하던 평범한 소녀였는데 진북국민학교에 다니던 때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가족이 많았지만 여자 형제가 없어 늘 섬처럼 지냈기에 혼자서라도 마음을 풀 수 있는 시에 대한 동경이 그만큼 자연스러웠고 강력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시인에게 어떤 영감을 준 것이었을까. 시인에게 ‘시를 쓰고 싶은 순간’을 묻자 “특별한 순간보다는 특별한 자극이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의 풍경이나 관계에 집중하는 편이며, 그래서 자신의 시는 결핍과 상처, 소외와 단절 같은 불안한 환경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어 시인은 “그런 것을 개인 대 개인으로 이야기하듯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최근 몇 년 동안은 사회에서 비롯된 자극들이나 긴장감이 많아서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새 시집에서는 그걸 더 밀어붙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람들 사이의 풍경과 관계를 오래 마주하는 시인에게 진북초등학교의 낙엽들과 작은 골목길에서의 어린 시절의 불안들은, 다친 마음에 잔잔한 파장으로 다가온다. 시집을 덮고 진북동에서 전주천이 온화한 11월의 햇살 아래 반짝거리는 풍경 속을 거닐며, 시인의 섬세한 언어들 역시 이 물빛과 닮았음을 기억했다.

이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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