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침입 관문 방패막이 ‘부안’
왜구침입 관문 방패막이 ‘부안’
  • 김황곤 시인
  • 승인 2020.11.02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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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2 (15)부안
‘부흥 백제의 정신’이 ‘큰 바위 얼굴’로 빛나다

 부안은 산·들·바다가 한데 어울려 천혜의 살기 좋은 고장으로, 옥야천리 황금 뜰엔 풍요와 온정이 가득하며, 서해바다 칠산어장은 세계로 벋어나는 진취기상의 보고(寶庫)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혜의 삶터는 오히려 야만적 외적의 침입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어 참혹한 전란과 가혹한 생활의 고초를 빚기도 하였으니, 이에 부안의 선현들은 일찍이 부안의 혼이 된 그 찬란했던 문화국가 ‘부흥 백제’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백성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힘 있는 나라, 백성이 존중되는 세상을 이루고자, 국난극복의 저항정신을 일깨우며, 목숨 바쳐 구국항전에 앞장서왔다. 이에 부안의 애국 열사들의 주요 사적지(史跡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 천인공노할 일제식민통치에 분연히 저항, 순국하신 대한독립의 충절을 찾아

상서면 가오리에는 항일의병 선봉장 김낙선 의사 추모공원 기적비(紀跡碑)가 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강탈됨에 분개하여 가족의 생계도 뒤로한 채 1909년 이용서(李用西) 의병부대에 들어가, 30여명의 동지를 규합 왜군과의 수많은 교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7년형의 징역을 살고, 그 후유증으로 44세에 끝내 순국하심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부안읍 신운리는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의사(義士)가 12세 때까지 꿈과 기개를 세운 고향으로, 그는 3.1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한. 중. 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 일본 기관들의 파괴와 요인암살, 친일파 숙정 등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에 신명을 다하다가 순국하심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김철수 선생

백산면 원천리에는 항일 독립운동가 지운(遲耘) 김철수(金?洙)선생의 생가, 초라한 토담집 ‘이안실(易安室)’이 있다. - 그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의 참혹한 고통의 광복을 위한 선결문제는 오로지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이라며, 한, 중, 대만의 동지들과 ‘신아동맹단’을 결성 반일 반제국주의 연대 투쟁을 벌였으며,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이동휘와 ‘고려공산당’을 창립, 국내 사회주의 운동 등을 주도하다가 2차에 걸쳐 14년의 징역형을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이하여 석방된 후 낙향하여 농사일에 전념하다가 순국하신 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왜구 침입의 관문에서 무참하게 목숨 버려 나라 지킨 애국충절을 찾아

상서면 감교리에는 정유재란 때 수많은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넋을 추모하고자 온 마을 분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타루비(墮淚碑)가 있다.

1597년 서해로 침입한 애구들이 물밀 듯 이곳 청등마을로 쳐들어오자 도곡(桃谷) 이유(李瑜)선생은 인근으로부터 의병들을 모으고, 문하생 수십 명과 온 가족이 참여 전력으로 토벌에 앞장섰으나, 아깝게도 이들 모두가 적의 흉탄에 무참히 참살 당하고, 이들의 시체도 찾지도 못한 채 초혼장(招魂葬)을 지내야만 했으니, 우리는 어찌 그 울분을 참으리요! 이름도 없이 순국하신 그 애절한 애국충절을 어찌 잊으리요!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에는 국난의 위기에 나라의 근간을 지켜 큰 공을 세운 고희(高曦장군과 고홍건(高弘建)장군을 기리는 효충서원(效忠書院)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안전하게 호종한 고희장군과 이괄의 난 때와 병자호란 때(남한산성)에 인조임금을 안전하게 피난시킨 고흥건장군을 기리는 곳이며, 부안에는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들을 막아낼 나라의 관문, ‘부흥백제의 산성’인 ‘부안읍성’이 있다.

부안은 백제 근초고왕 때에는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倭寇)들의 정벌로 ‘찬란한 백제국의 기틀’을 쌓았고, 상서면 소재의 ‘주류성’은 ‘부흥 백제군’의 마지막 항전지로 현존하며, 조선조에서는 전라감영의 전주성보다 3배나 더 큰 부안읍성(扶安邑城)을 축조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피안(彼岸)의 요충지로 삼아왔다

■ 일제에 강탈된 국권회복과 새 나라 육영사업의 개척자가 된 우국지사를 찾아

계화면 양지에는 구한말 거유(巨儒)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의 유지, 계양서원이 있다.

간재, 그는 1905년 일제와의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조약에 서명한 오적의 대신들을 처단하고 일제와의 늑약을 폐기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며. 1922년 82세로 명(命)을 다할 때까지 이곳 계화에서 약 5,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 국권회복에 신명을 다한 우리의 영원한 선비이시며

부안읍에는 식민지 암흑기에 쌓인 썩은 물 씻어낼 새 나라의 동량(棟梁)을 기른 우국지사가 많이 있다.

거액의 재산을 털어 부안중, 부안여중, 부안농림고 등을 세워 부안 육영사업의 개척자가 되신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선생과 춘헌 선생과 함께 부안여중, 부안여고 등을 세워 부안 여성교육에 선도자가 되신 백주(白洲) 김태수(金泰秀)선생은 바로 그 대표적인 우리고장의 미래를 밝힌 등불이시다.

■ 일제 식민지 수탈산물의 일본운송 거점이 된 부안

줄포는 식민통치시대 일본이 수탈한 호남지방의 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거점이었다.

주 대상은 쌀과 면화 등의 곡물류였고, 줄포항, 경찰서, 도정공장, 통운창고, 식산은행, 어업조합 등의 기관과 시설은 수탈 강행을 위한 주 동원수단이었으며 백산에서는 일본인 오모리(大森) 대농장 등과 와까야마(若山榮治郞) 도정공장이 갖은 수탈을 강행, 그 축적한 그 부(富)를 일본으로 빼돌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신석정 선생

 # 지조 높은 항일 민족시인 신석정의 생가 청구원 (靑丘園)

일제 통치 ‘그 혹독한 겨울’을 지조 높은 조국애의 ‘촛불’로 조국광복의 새벽을 그리다

부안읍 선은리에는 석정(夕汀)이 ‘부흥백제의 산성’을 가슴에 안고, 앞마당 넘실대는 광활한 서해바다 은물결로 민족애의 타는 ‘촛불’을 켜 ‘일제 암흑의 절망’을 녹이는 산실된 그의 생가 ‘청구원’이 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기간 끝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어로의 협박 원고청탁을 단연코 거절하였으며, 식민시대의 절망과 참담함을 치열하게 토로하고, 독재와 군사 통치에 맞서 격정과 저항들을 분출하며, 조국광복의 새벽과 봄날을 그려 온(참조: 아래 석정의 시(詩) 일부) 조국애의 지조 높은 현대시의 거목이시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밤뿐이로다//…막막한 이 한밤이/ 천년을 간다 해도…/ …밤에서 살으련다/ 새벽이 올 때까지/… 검은 밤을 지니고.//

따라서 이곳 부안에서 석정(夕汀)은 자랑스러운 부안인으로 명기(名妓) 이 매창, 명승(名勝) 채석강과 더불어 부안의 3절(三絶)로 회자되기도 하며. ‘석정문학관’을 세워, 그의 높은 문학정신을 계승하고자, 세계문화의 장으로 활짝 문을 열고 있다.

 김황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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