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을 아우른 효부상의 박금이
영·호남을 아우른 효부상의 박금이
  • 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20.11.0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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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을 존중하고 삼강오륜을 철칙으로 삼아 살아온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마음은 수많은 역풍과 박해를 이겨내며 면면히 계속되었다. 왕조시대였기에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맨 먼저 강조하고 나섰지만 그것은 왕을 모시는 정승판서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제일근본으로 삼았다. 효도는 인간으로서의 도리였으며 부모로부터 받은 나의 신체는 머리카락까지도 훼손하는 것은 불효라고 낙인찍을 정도로 엄격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정부는 효자·효녀·효부상 등 다양한 방법의 포상방법을 강구해냈고 광범위하게 이를 실천했다.

 그중에서도 효부(孝婦)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편의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었다. 시집온 여인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전근대적 사고를 강요받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집에 생명을 바치라는 교육 속에서 살아야 했다. 현대적 의미의 여권(女權)은 천만의 말씀이었다. 시부모가 죽으면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가장 올바른 여성의 본분인양 강요했던 것이다.

 지금도 지방에 가면 길가니 논 두럭 같은 곳에 조그마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오랜 세월 풍설을 견디며 버텨왔지만 이제는 거의 허물어져 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안에 비석이 서 있다. 효자비 또는 열녀비다. 드물지만 효부비(孝婦碑)도 있다. 효부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것은 물론 늙어서 치매에 시달리거나 나쁜 병에 걸려 앓고 있는 시부모를 온갖 고생을 다하며 돌봐준 며느리를 일컫는다.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숨이 넘어가는 시부모의 목에 자신의 허벅지를 칼로 찔러 피를 넘겨줬더니 후우하고 숨을 내리 쉬었다는 얘기까지 있다.

  이런 며느리는 당연히 관아로부터 효부표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어쩐지 한쪽 가슴이 미어지는 듯 슬프기까지 한다. 물론 스스로 우러나 자진해서 한 일이었겠지만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던 기득권 시집의 강요는 없었을지 못내 풀리지 않는 의문점도 있다. 현대로 들어서며 이런 풍습은 사라졌다. 예전에 한참 유행을 탔던 우량아 선발대회가 슬그머니 없어졌듯이 효자 효부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 성북구청(구청장 이승로)에서 박금이씨에게 효부상을 수여했다.

 그의 공적은 과거의 효부지도와는 딴판이다. 그의 시어머니 문순임여사는 지난 8월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전북 정읍시 고부면에서 비록 활동이 불편하긴 했지만 아픈데도 없이 자식들이 돌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살았다. 내가 2년 전 장남 김정일과 함께 방문하여 절을 드리니까 손을 붙들고 “내 자식을 잘 돌봐달라”는 뜬금없는 말씀을 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늙으신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이미 팔십이 된 자식도 물가에 서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던 것일까. 이런 시어머니를 도대체 어떻게 모셨기에 박금이 며느리가 효부상을 받게 되었을까.

  박금이는 경북 구미시 해평면 출신으로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공무원 김정일과 결혼했다. 그들은 성북구 하월곡동 무허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으며 고부 시댁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박금이는 미용실을 차려 박봉에 시달리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여동생 셋을 서울에서 함께 살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모두 공무원으로 취업시켰다. 남동생 두 사람도 교육계에서 평생을 봉직하며 교감과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막내동생은 대기업건설회사의 본부장으로 근무 중이다. 이들 시댁의 형제들을 뒷바라지하는 한편 시어머니의 이름으로 ‘문순임 장학금’을 만들어 향리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줬다.

 자신들도 넉넉하지 못한 데 시어머니 이름으로 작은 정성을 바치는 미담은 1985년부터 시작하여 이미 35년째다. 문순임여사는 생전에 정읍 기네스 인증서를 수상했다. 정읍시(시장 유진섭)는 정읍을 빛낸 특이한 분에게 정읍 기네스를 수여하고 있는데 문 여사의 공적은 아들딸 6인이 모두 공무원으로 근속연수 202년을 국가에 봉직했으며 그들이 수여받은 훈장이 여섯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최장기록으로 확인되었다.

  문 여사의 장례식에는 유진섭시장을 비롯하여 강광 김생기 전 시장, 김종하 향토문화연구회, 이보택 김연수 언론인, 재미칼럼니스트 은호기, 4.19혁명 공로자 조인형, 은희태시인 등 많은 이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들이 쓴 추모의 글이 정읍 내외를 뒤덮었다. 박금이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시집온 후 50여년 동안 끊임없이 고부(古阜)의 시어머니와 형제들을 아우르며 문 여사의 정읍 기네스 인증을 가능하게 했기에 성북구에서 효부상을 수여하게 된 것이다.

  남편 김정일은 중대를 나와 정보통신부 서기관으로 정년퇴직하며 많은 저서와 일화를 남겼다. 특히 4.19혁명 당시 중대학생으로 경찰의 총탄에 희생된 김태년과 서현무를 영혼 결혼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현재 4.19혁명중앙대기념사업회장을 맡아 봉사한다.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영호남을 아우르는 모범적인 부부로 칭송받을 만하다.
 

 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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