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 가을 남자
[독자수필] 가을 남자
  • 정성수 향촌문학회장
  • 승인 2020.11.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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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숙살肅殺이다. 봄여름을 풍성하게 한 풀과 꽃과 나무를 가을의 쌀쌀한 기운이 말려 죽인다는 뜻이다. 푸름과 아름다움으로 싱싱하던 것들이 누렇게 변하고 조석으로 부는 바람은 청명하면서도 처량하다. 한때 성했던 것들이 고요에 빠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가을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낙엽과 가슴으로 받아드리는 낙엽은 확연히 다르다. 바람이 낙엽을 머리 위로 한 잎 두 잎 떨구어 준다면 쓸쓸함이다. 가슴 복판에 낙엽을 한 잎 두 잎 떨구어 준다면 그것은 슬픔이다.

  나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가슴앓이를 한다. 맑고 투명하고 눈부신 하늘을 보면 왠지 슬퍼지고 비라도 주적주적 내리는 저녁거리는 하염없이 걷게 만든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주책없다고 피식 웃어보지만 가을은 나를 가을 속으로 자꾸만 끌어당긴다.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믿었던 사람들로 부터 배신을 당한 상처가 깊어지고, 하수상한 세월이 목덜미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들어오는 골목에 ‘Autumn Coffeeshop’이라는 커피숍이 있다. 가을이 되면 통유리 창에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길을 바라보고 있다. 조화에 불구하지만 가을이 발끝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Autumn Coffeeshop’라는 이름이 좋았고 커피숍 창을 장식한 꽃들도 좋았다 ‘Autumn Coffeeshop’ 앞을 지나갈 때마다 한번쯤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서 가을 하늘 뭉게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지난 가을 어느 날이었다. 고인이 된 김정수 시인이 뜬금없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웬일이냐고 묻자. 오늘은 ‘Autumn Coffeeshop’에 가서 커피 한 잔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럼에 불구하고 왜?냐고 묻자. 그냥! 이라고 싱겁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나는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창문에 걸린 코스모스와 해바라기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저 꽃들이 자꾸 눈짓을 보내 한 번은 꼭 와야 할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내 말이야’ 한 마디 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별 말이 없었지만 ‘Autumn Coffeeshop’ 통유리창에 걸린 조화 코스모스와 해바라기에서 한편의 시가 곱게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 후 김정수 시인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고 나는 철없이 별을 바라보는 늙은이가 되었다. 오늘 저녁에도 ‘Autumn Coffeeshop’ 통유리창가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눈물에 흐려 보이는 간판 ‘Autumn Coffeeshop’ 불빛이 나를 위로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흰색과 검은색이 뒤 섞여 회색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히죽 웃던 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을 남자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다가 가을이 되면 좌판 위에 누운 생선처럼 푸석해진다. 가을 남자는 기억의 저편에 살아 있는 신화처럼 우쭐대다가도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쓸쓸함을 삼킨다. 후미진 골목 선술집에서 그 여자의 미소를 기억해 내고 추억을 마시는 가을 남자는 혼자서 가을이 된다.
 

 글 = 정성수 (향촌문학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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