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가야봉화의 허구
전북 가야봉화의 허구
  • 김주홍 문화재청 사적분과 전문위원
  • 승인 2020.10.2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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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봉수의 개념과 가야봉화·조선봉수의 비교

 

전북 동부지역은 한국 고대 백제의 옛 영역이다. 대표적으로 완주, 진안, 장수 등 7개 시·군이다. 최근들어 이 지역에서 종전에 그리 언급되지 않던 가야유적 기사가 지역 언론에 넘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철과 봉수이다. 최근 조사로 확인된 유적 수는 각각 231개소, 107개소이다.(전라북도, 『전북가야 제철 및 봉수유적 정밀현황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2019.08.)

  이중 봉수 107개소는 1963년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된 금산군 소재 6개소를 포함한 수량이다. 지역별로 진안 25개소, 장수 21개소, 완주 15개소 등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북을 ‘봉수왕국’ 이라고 부를만하다. 그런데, 봉수제의 시원단계인 고대 삼국시대에 전북가야에서 이렇게 많은 봉수를 과연 운영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수량이 너무 많다.

  조사자는 무엇을 근거로 이들 성격미상의 다수 유구를 가야봉수라 할까? 이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130여년전 최종 폐봉된 조선봉수와 그 이전 고려봉수의 운영과 실체도 아직 불명확한데, 조사자는 1,500년전 가야봉수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이런 주장을 할까? 가야봉화와 조선봉수는 큰 차이가 있다는데 과연 큰 차이가 있을까?

 

 # 봉수는 낮[晝]에 연기[煙氣], 밤[夜]에 횃불[烽]을

  봉화는 횃불[烽]과 불[火]을 이용해서 밤[夜]에 신호를 주고 받았던 통신수단이다. 봉수보다는 이른 시기의 용어이다. 『삼국사기』 권37, 고구려 한산주의 주·군·현·성에 “달을성현(達乙省縣) 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들고 안장왕을 맞이하던 곳이기에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다.”라고 한 용례가 있다.

  『고려사』에 봉화는 봉확(烽??) 혹은 봉수와 혼용하여 표기되었다. 조선시대 관찬 지지인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는 부·목·군·현별로 봉화의 수량을 ‘봉화○처’ 등으로 표기하였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부터 봉수조를 두어 봉수 명칭이 표기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발간 관·사찬 읍지나 저명한 문인이 남긴 문집의 시에는 여전히 봉화 명칭이 봉·봉수·봉대·봉수대 등으로 혼용된 채 같이 표기되었다.

  봉수는 낮[晝]에 횃불[烽], 밤[夜]에 연기[煙氣]를 이용해서 신호를 주고 받았다. 봉화 보다는 좀 더 포괄적이고 다목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사』에 봉확 혹은 봉화와 혼용하여 같이 표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 6년(1406) 3월, 동북면 도순문사가 봉수 등 국방 대책에 관해 올린 사의(事宜)에 최초 용례가 있다. 봉화와 마찬가지로 조선 전(全) 시기 발간 관·사찬 읍지나 문집의 시에 봉·봉화·봉대·봉수대 등으로 혼용된 채 같이 표기되었다. 

연번봉수-전남 고흥유주산봉수 연대


 # 가야봉화와 조선봉수의 비교

  전북 가야봉수 조사자는 최근 지역언론(전북A신문, 『가야봉화와 조선봉수 큰 차이』, 2020.08.30.)에 “반파국, 즉 가야봉화대는 길이 8m 내외로 소형이며, 그 축조 재료도 다양하다. 재료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깬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흙으로 쌓거나 암반을 다듬은 경우도 있다. 섬진강 유역 봉화대는 거칠고 조잡하게 쌓았다는 점에서 긴밀한 공통성을 보였다.”라고 하였다. 반면, “조선시대 봉수는 연대라고 부르는데, 봉수의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길이 40m 내외로 대형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야봉화’ 용어를 통해 ‘조선봉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조사자의 위 언급은 조선봉수 중 연대(煙臺)로도 지칭되는 연변봉수(沿邊烽燧)를 설명하고 있다. 연대는 평면이 방형 혹은 원형과 말각방형이다. 축조는 석축 혹은 토·석 혼축이며 외석내토(外石內土)이다. 축조 시 대소 화강석 혹은 할석을 섞어 수직 혹은 상부들여쌓기 하였고, 석재 사이의 틈에는 작은 돌로 채웠다. 규모는 하부 직경 7∼9m, 높이 3m 내외, 하부 둘레 28∼36m 가량이다. 그리고, 측면에는 나선형의 오름시설을 1개소 마련하였다. 따라서 조사자가 언급한 조선시대 봉수 길이 40m는 둘레를 말하는 것이다. 가야봉화 길이가 8m 내외라면 둘레는 저절로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가야봉화와 조선봉수는 규모가 거의 같은 셈이다. 왜 연대 둘레를 길이라고 하여 애써 가야봉화는 소형이고, 조선봉수는 대형임을 강조하려 했을까? 의문이 든다.

  또한, 발화시설에 대해 “가야봉화대는 발화시설이 한 개소이다. 발화시설은 처음에 원형을 이루다가 후대로 가면서 그 평면 형태가 앞쪽이 둥글고 뒤쪽이 네모난 전방후원형으로 바뀐다. 섬진강 유역에 배치된 봉화대는 발화시설이 대부분 전방후원형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반면, “조선시대 봉수는 연조로 불리는데, 연대 위에 만든 연조는 그 수가 다섯 개이다.”라고 하였다.

  조사자의 위 언급은 내지봉수(內地烽燧)를 설명하고 있다. 방호벽(防護壁)의 평면형태에 따라 방형계·원형계로 구분된다. 축조는 대응봉수와의 조망이 양호한 산정부 혹은 능선부 사면을 정지하여 석축 혹은 토·석의 방호벽을 시설하였다. 그리고, 출입시설을 1∼2개소 마련하였다. 방호벽 내에는 거화 혹은 거연을 위한 연조(煙?) 5기를 ‘一’자형 혹은 ‘V’자형 등으로 지형여건에 맞게 시설하였다. 따라서 조사자가 언급한 연조는 연대 위에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방호벽 내부에 시설한다. 규모는 방호벽 외부 둘레 평균 80m 내외이다.

내지봉수-경기 성남천림산봉수

  다음 가야봉화의 발화시설은 문헌기록에 용례가 없는 신조어이다. 그리고 이를 가야가 시설하였다고 볼 만한 근거도 없다. 발화(發火)를 ‘불을 일으킨다’ 의미로 보았을 때 이는 야화(夜火)를 의미한다. 즉, ‘밤에 불을 일으키기 위해 만든 시설’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사자가 주장하는 전북 동부지역 107개소 가야봉화는 모두 발화시설을 마련하고 밤중에만 불을 올렸을까? 발화시설 한 개소로 어떻게 안위(安危) 여부를 구분하고 알렸을까? 가야봉화가 반드시 불로만 신호를 전달하였을까? 섬진강 유역에 배치된 봉화대도 발화시설이 대부분 전방후원형을 이룬다는데 어떤 봉수를 말하는지? 규모와 분포는 어떠한지? 설명이 없다. 필자는 조사자가 주장하는 이 전방후원형의 발화시설이 시기 미상의 어느때에 산정부 암반을 파서 깃발을 꼽기 위해 홈을 파고 이를 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싶다. 따라서 이 발화구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셈이다.

  필자는 본 지면에 가야봉화와 조선봉수의 비교를 통해 전북 가야봉화의 대표적 주창자인 조사자가 130여년전 조선봉수의 기본 개념과 실체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500년전 전북 가야봉화 운운하는 것은 지금부터라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왜곡’과 봉수의 잘못된 인식을 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전북 가야봉화 107개소. 국력이 그리 강대하지 않았을 시기에 이렇게 많은 봉화를 축조하고 제대로 운영하였을까? 혹시 백제가 초축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3국통일 후 통일신라가 이 지역에 들아와 초축하지는 않았을까? 봉화 아닌 것을 봉화라고 하는가? 가야봉화라고 볼만한 근거와 실체가 무엇인지 충분한 조사와 학계의 검증도 없이 그간 너무 앞서 나갔다.

 
 김주홍 <문화재청 사적분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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