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 톰슨의 ‘새드 무비( Sue Thompson ?sad Movies)’
슈 톰슨의 ‘새드 무비( Sue Thompson ?sad Movies)’
  • 김헌수 시인
  • 승인 2020.10.20 17:0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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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1>

 "우리 딸내미는 해피 해야 혀"

 저만치 아버지 슬리퍼 끌고 주전자를 들고 오는 계집애가 보인다. 슬쩍슬쩍 맛보더니, 이내 비척거리다 자빠졌다. 술은 다 엎지르고 빈 주전자만 집으로 돌아왔다. 자갈길에 넘어져서 깨진 이마에 담뱃가루를 짓이겨 발라주던 아버지. 흉터가 있어 기억되는 그 자리가 이따금씩 욱신거린다.

 이태백이도 울고 갈 애주가였던 아버지, 오늘도 알코올로 사방이 둘러쳐진 하늘궁전에서 술 한잔 쭈욱 들이키시려나? 생전에 아버지는 술을 참 재밌고 즐겁게 예술 하듯 마셨다. 뒷마무리는 노래로 마치셨다. 나는 그 노래가 좋았다.

 감색양복을 즐겨 입으시고, 조개젓과 고들빼기김치를 좋아했던 아버지. 뇌경색으로 누운 엄마의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없으셨던 아버지. 마흔아홉에 마누라 하늘로 보내고 1남 3녀를 가르치고 키워 낸 아버지. 삶이 항상 유쾌하고 즐거울 리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니셨다. 술에 취에 들어오시는 밤이면 골목어귀부터 노랫소리가 퍼졌다.

 “오 오 오 새드 무비

  올 웨이즈 메이크 미 크라이

  오 오 오 새드 무비

  올 웨이즈 메이크 미 크라이”

 

 다른 부분은 생략하고 꼭 이 부분만 돌림노래처럼 돌고, 돌고……. 아버지의 레퍼토리 노래는 언제나 ‘새드 무비’였다. 아버지의 취중진담도 항상 돌림노래였던 것처럼.

 

 “헌수야,

  아버지가 공부 허라고 안혀, 일단은 건강해야 허고,

  아버지가 술 많이 먹고 와서 미안혀

  그런데 말이다,

  술은 인생의 수레바퀴 같은 거여

  노래는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거고

  사람은 말이다, 보들보들하니 품이 넓어야 혀

  둥글둥글하니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하는 거지

  너무 팍팍하게 살면 재미 없자녀

  기름칠을 해야 하는 것이지

  뭘로?

  뭐거써 술 이지

  거기다가 노래가 들어가면 그걸로 된 거여

  우리 딸내미는 해피 해야 혀

  아버지 마음 알지?

  새드 무비가 아니고 해피 무비여야 헌다고

  암먼…….”

 

 나는 고교시절 영어공부는 뒷전이었고, 팝송 대백과만 끼고 살았다. 새로운 노래를 익히고 들으면서 아바를 만나고, 퀸을 만나고, 엘튼 존과는 주구장창 함께 살았다. 친구들에게 가사를 적어주는 전담반이 나였고, 좋아하는 노래를 음악사에서 녹음을 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LP판을 하나씩 사 모으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들으면서, ‘감성헌수’로 살았다.

 가사를 적고 외우며 기타를 치며 지냈다. 쉬운 코드만 잡아서 튕기다가 어려운 코드가 나오면 능청맞게 손뼉으로 겉멋을 부렸다. 기본 코드를 배우다 의욕이 불탔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겼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 귀는 얼마나 시끄러웠을까마는 그저 넉넉히 바라봐준 모습이 선명하다. 내가 하는 일이라면 격려해주고 자상하게 스크랩을 해서 책상위에 얹어주곤 했다.

 하이코드를 잡게 된 어느 날, 아버지가 팝송 대백과 책에서 노래 한 곡을 건넸다. 슈 톰슨의 ‘새드 무비’였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실 때 흥얼거리며 부르시던 그 노래였다. 늘 듣던 때와 달리 눈에 번쩍 가사가 들어왔다.

 

 “언제나 슬픈 영화는 날 울게 해요,

  oh-oh-oh-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

  oh-oh-oh-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

 

 그날은 아버지만의 노래가 정신없이 쳐대는 나의 기타소리와 어우러진 밤이었다. 슬픈 영화 같은 삶은 저 편으로 던져버리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자, 이런 마음이 서로의 마음에 닿은 것 같다. 담장 너머 뒷집 개 짖는 소리도 덩달아 들썩거렸다. 달빛이 유난히 환했던 그 밤은 돌림노래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이 온전히 같이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와 나의 바람이 오래오래 새겨지던 밤이었다.

 글을 쓰는 내내 그날처럼 아버지는 내 곁에 찾아와 돌림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오 오 오 새드무비

  올 웨이즈 메이크 미 크라이” 

 

 김헌수 시인

 2018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 당선, 시집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펜드로잉 시화집 <오래 만난 사람처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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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 2020-10-20 20:46:02
울아빠 생각난다ㅠ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벼리 2020-10-20 20:36:47
슬픈데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