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던 방짜유기 이종덕 장인 “장인들 향한 지원책 필요”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던 방짜유기 이종덕 장인 “장인들 향한 지원책 필요”
  • 김기주 기자
  • 승인 2020.10.1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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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0℃가 달하는 화염 속에서 구리와 주석을 각각 78%와 22%의 비율로 정확히 섞어 녹인 다음 묵묵히 용해로와 화덕을 오가길 수백 번, 이후 수천 번의 망치질을 거듭해야 영롱한 하늘색 황금빛이 나는 방짜유기(방자유기) 하나가 탄생한다.

 방짜유기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주물유기와 다르게 제작 과장이 까다롭고 숙련된 기술을 요구된다. 그만큼 변색이 잘 이뤄지지 않고 내구성도 좋은데다 멸균 기능까지 지니고 있다.

 오늘도 이러한 고된 과정을 묵묵히 이행하는 한 장인의 손길을 통해 또 하나의 문화가 탄생하고 있다.

 장인의 이름은 이종덕(62) 명인. 전북도민일보는 전북 무형문화재 43호로 지정된 이 장인을 만나 그의 방짜유기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방짜유기 그리고 전주와의 인연 

 방짜유기는 현시대 고급명품과 견줄 만 하다. 조선시대 접어들며 체계화된 유기기술을 통해 놋쇠로 만든 다양한 생활용구가 사용됐는데 이 중 방짜유기는 임금님 수라상에 사용될 만큼 무독, 무공해 금속제품인 유기는 음식을 담는 최상의 식기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방짜유기는 조선시대부터 송도, 대구, 전주 등에서 주요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다. 이 중 판매와 생산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단연코 전주라고 이종덕 장인은 설명했다.

 이 장인에 따르면 전주에서는 유기전 1·2·3길이 존재하는데 이는 조선시대부터 6·25 한국전쟁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방짜유기가 탄생하고 판매되는 곳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주와 남원에 유기장들을 관리하는 공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전주를 중심으로 익산의 이리유기점, 김제 금산에 원평유기점 등이 있어 주발과 대접, 식기는 물론 징, 꽹과리 등의 악기를 생산하던 방짜 공장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통 방짜유기가 아닌 일반 주물 유기가 성행했고 이후 스테인리스나 플라스틱 같은 제품에 밀려 방짜유기는 조금씩 대중에게 잊혀갔다.

 ◇ 전통공예 발판삼아 전주서 튼 ‘둥지’

 이종덕 장인의 고향은 전북이 아닌 충남 부여다. 학창시절은 서울에서 보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주물공장에 취직, 쇳물을 일정한 틀 속에 붓고 굳혀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나만의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이 장인은 독학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방짜유기 제작의 길을 걷게 됐다.

 이어 이 장인은 1992년 경기도 의왕시 나자로마을에서 공장을 설립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지난 2006년 전주로 터전을 옮겼다. 이후 전북의 전통공예를 발판삼아 김제 원평에 개인작업장을, 익산에 공동작업장을 만들었고 정읍에서 폐교된 학교를 인수해 새로운 방짜유기 전시장소를 구상 중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 내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방짜 유기라는 최고의 전통공예제품을 제작했지만 인정은커녕 타지에서 왔다는 ‘주홍글씨’때문에 손가락질과 핍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장인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언젠가 자신의 진가를 세상이 더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인은 “전통공예품을 두고 흔히 계보가 없으면 문화재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있다. 하지만 모든 공예에 검증된 계보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며 “전주로 내려왔을 때 방짜유기와 관련해 정통한 사람이 드물어 외지인 취급을 당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토로했다.

 묵묵히 자신의 외길을 걸어온 그는 2006년 제31회 전승공예대전 본상, 2007년 청와대 대통령 전용식기 제작, 2010년엔 전북공예품 경진대회 금상 수상 등을 거쳐 지난 2011년 전북무형문화재 제43호에 지정됐다.

 ◇ 방짜유기의 우수성, 더불어 이 장인의 고민

 이종덕 장인은 대한민국의 방짜유기가 전 세계 모든 유기 중에서 단연코 으뜸이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구리 속에 주석이 용해되는 최대용량은 14%로, 이를 초과하면 성형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메질을 통해 재료의 강도와 탄성을 증가시키는 단조기술을 바탕으로 주석을 22%나 함유하고도 성형을 가능하게 하여 세계에서도 유례 없는 고유의 유기성형기술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에 이 장인은 순도가 좋은 구리와 주석을 사들이고 장장 14단계에 걸친 수작업 공정으로 명품 방짜유기를 제작하고 있다. 징이나 꽹과리 등 방짜유기로 만든 악기는 전통방식을 고수한 탓에 타 재료의 악기보다 고가임에도 꾸준한 수요가 이어지고 있다.

 이 장인이 만든 꽹과리와 징은 국립국악원, 김덕수 사물놀이 등 국내 최고의 팀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릇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아 전 노무현 대통령 전용식기로 채택될 정도로 국내 최고의 방짜유기로 알려졌다.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방짜유기는 수작업 위주의 공정과 대량생산이 어렵다는 특성 때문에 시간이 기술을 전수받겠다는 이가 줄어들고 있어 아쉽기만 하다”고 제자 양성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장인은 향후 방짜유기 체험관을 조성해 대중들에게 방짜유기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방짜유기 아카데미를 만들어 기술전수 교육을 상시 하고 싶은 마음도 가득하다.

 이 장인은 “현재 전통공예를 이어가고 있는 장인들을 과거 일제시대 ‘독립투사’와 견주고 싶다. 그만큼 전통공예 상황이 어렵다는 것이다”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공예업계로 유입돼야 앞으로도 대한민국 대표하는 전통공예품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전통공예를 이어가는 장인들을 위한 지자체의 진심 어린 지원책이 수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주를 방짜유기의 메카로 만들고 싶다는 이 장인은 “전북의 기존 관광상품과 방짜유기까지 결합한다면 큰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다”며 “방짜유기 및 전통공예의 새로운 부활을 이뤄질 때까지 노력하겠다. 더불어 전북도민들이 방짜유기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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