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채움을 생각하는 나이 듦
비움과 채움을 생각하는 나이 듦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10.11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이 듦은 비워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을 깨닫게 해준다. 나의 늙음은 내가 제일 늦게 알아본다고 한다. 한 해 마무리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10월이다. 나 스스로 돌아볼 때 겸손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나온 시간을 고민해 보는 성찰의 공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버려야 할 것, 남겨놓고 가야 할 것이 광주리에 가득하지만 가져가야 할 것은 빈손이다. 빈손도 나의 몸 일부분이겠지만 빈손의 가벼움을 알기까지는 매우 힘든 고뇌를 겪어야 했다.

 점점 가을 문턱에 들어서자 가을 숲의 색채처럼 사람의 마음도 물들어 가는가 보다. 적막한 저녁 응접실의 풍경은 어떨까?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어디에서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귀뚜라미 소리시늉을 하며 가을밤을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환상의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연주를 듣는 내내 음악이 선물하는 평화로움과 아늑함으로 정서적 충만감을 가져보는 가을밤이다. 오케스트라 울림의 소리가 아니래도 함께한다는 순간이 행복을 말해준다.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물봉선 용담 개미취 그리고 꿩의다리 고마리꽃들은 향기로 가을 숲을 아파트로 초대했지 않은가.

 안방과 응접실 사이로 먼저 온 가을을 맞이하면서 코로나19에 찌든 여름의 무게를 내려놓는 가을밤이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생각의 시간도 깊어 간다. 가을 숲의 단풍 든 색채처럼 사람의 마음도 물들어 간다.

 가을은 비움을 우리에게 알린다. 어떻게 나무와 잎이 이별하는 건지, 어떻게 슬프지 않고 내년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허공을 휘돌며 낙엽은 아픔을 색으로 말한다.

 잎사귀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는 나무는 아마도 무소유의 아름다움을 터득하였을 터. 초록색을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색으로 바꿔입은 잎사귀를 나무는 아픔을 참아내며 떨쳐 보낸다. 나무가 잎을 떨치는지, 잎이 나무를 미련 없이 떨쳐버리는지 그들만의 속삭임을 보는 사람 스스로 듣는다.

 가을 숲의 색채처럼 단풍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저절로 물들어 감은 사실이다. 그래서 가을이 왔노라고 말한다. 가을은 나무로부터 얻는다. 버려야 할 것과 남겨놓고 겨울을 보내야 할 것을 분별하는 가을의 지혜가 필요한 나무의 생각에 접해본다. 가져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숲 나무들이 겨울을 맞이하는 일은 경이롭다. 최고의 색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열매와 잎사귀들과 이별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떠나보낼 것도 떠나보내는 결심은 대단하다. 가을 끄트머리에서 비움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되새김질하면서 시간을 채우는 일이다.

 나무는 열매에 긴긴 시간 생과의 싸움을 열매에 녹여낸다. 그 사연을 담은 열매는 나무 그늘에서 멀리, 더 멀리 멧돼지 등을 타고 삶의 터전을 자리 잡는다. 머무는 흙 속에서 어미나무의 바람과 소리와 전설을 담아 초록을 틔운다. 태양과 달 그림자를 앎에서 점점 성장한다.

 갑자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서식하고 있을 흰발농게가 떠오른다. 흰발농게가 63만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는데 사람을 위해 4만여 마리를 이주 작업을 한다는 뉴스가 생각난다. 어느 힘센 사람의 논리적인 항거 때문에 이주 작업에 벌벌 떨고 있을 주눅이 든 흰발농게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터득한 행동일 것이다.

 내가 점점 힘의 무게가 사라져가고 있을 때 비움과 채움의 대화를 했다. 그동안 나의 끝은 ‘죽음’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터라서 가슴에 작은 진동을 느꼈다. 그러나 대화는 깨달음과 후회를 동반하고 마음의 생각이 열리기 시작했다. 역시 우울증은 극복이 아니라 수용이다. 감정은 내가 걸어가야 할 신호다.

 가장 외롭고 절박한 사랑이 필요할 때 허기진 결핍을 어떻게 충족하는지가 고민이었다. 가족관계에서부터 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볼 일이다. 느티나무가 수많은 잎을 떨쳐버리듯 내 생각을 비우는 체험이 간절할 때는 나이 듦이다.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