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해설>
십 오년 전에 보내온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집 맨 끝에 매달려 있는 ‘시인의 말’ 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시는 재미로 만나거나 어울려 즐겨야 좋은데 그것에다 내 존재와 세계를 다 싣고자 하니 서로 힘들다. 그러나 그 일마저 없었다면 무엇으로 이 썰렁한 세상을 건넜을까 생각하면 시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시 마저 없었더라면 무엇으로 ‘썰렁한 세상’을 건너왔을까요? 또 이 시대의 가장으로 사는 아버지들은 술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고달픈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요. 우리의 아버지들도 아버지로서 지키고 싶은 권위와 체면이 저마다 있었을 겁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한 남자로서 세상과 맞서는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지요. 언제 무슨 일이 얼어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한참 동안 가로등 불빛 아래서 서성이다가 막상 대문을 열 때는 고개를 바짝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네 아버지였으니까요.
시인의 시에서는 세상의 모진 바람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한때는 세상에 지는 것 같아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갔을 테지만 이제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고 합니다. 어둠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같이 사는 집. 그 곳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사는 곳이니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서 힘을 얻자고 하네요. 우리 모두 같이 소망해 봅니다.
강민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