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꽃, 천년의 열매 ‘전라감영’
찬란한 꽃, 천년의 열매 ‘전라감영’
  • 권순재 기자
  • 승인 2020.10.07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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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 전북도민일보 DB.
전라감영. 전북도민일보 DB.

 조선왕조 500년 전주의 자존심을 지킨 전라감영이 복원됐다. 비록 조선시대 당시의 완전한 모습을 되찾지 못했지만 전라감사가 업무를 본 선화당 등 주요 핵심 건문들을 갖추고 옛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 조선왕조 감영의 대표성

 전라감영은 현재의 전북과 전남 그리고 제주의 행정,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 도백(道伯) 등으로도 불렸던 감사가 행정권은 물론 군사권과 사법권까지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곳이다.

 전라감영은 평양·원주·해주·함경감영 등 다른 감영과 달리 조선 500년 동안 같은 장소에 자리했으며, 그 규모 또한 조선조 감영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 태조의 관향이 전주였다는 사실 때문에 객사와 감영, 부영 배치의 조화뿐만 아니라 경기전, 조경모가 적절한 공간 배치를 이루는 등 전라감영은 호남의 상징 외에도 조선 감영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전라감영은 다른 감영과 달리 한지를 만드는 지소,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을 둔 특징이 있다. 이는 전라문화 형성의 기반으로 작용, 조선의 인쇄문화 발전에 기여해 전라문화의 지식기반을 축적하고 보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여기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호남 일대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전라감영을 점령하고 부지 일부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이는 봉건왕조에서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이 개혁을 단행하는 민중권력의 출발지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있다.

 ▲ 폭발로 소실된 전라감영 70년 만에 복원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소실된 전라감영은 이후 1년 뒤인 1952년 감영이 있던 터에 전북도청사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전라감영 복원 논의는 전북도청사 이전 계획이 확정된 1996년 시작됐다. 전라감영은 도청사가 철거된 뒤 2017년부터 104억원이 투입돼 소실로부터 70여년 만에, 복원 논의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복원됐다.

 새로 태어난 전라감영에는 웅장한 외관과 우아한 곡선의 팔작지붕이 돋보이는 선화당, 내아, 내아 행랑, 관풍각, 연신당, 내삼문, 외행랑 등 7채의 핵심건물이 들어섰다.

 시는 전라감영 서측부지에 대한 활용 및 정비 방안을 검토하기 위한 용역을 마치는 대로 2단계 복원에 나설 계획이다. 활용방안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임시 정비하겠다는 방침이다. 시민들에 대한 개방은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추후 개발될 예정이다.

 ▲ 전주의 자긍심, 전주의 미래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2016년 전라감영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옛 전북도청사 부지가 단지 조선시대의 전라감영 부지일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때부터 1300여 년간 관청 자리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고 밝혔다. 전라감영 터가 적어도 1300년 동안 주변을 통치했던 중요한 곳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주와 전북에서는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가야와 백제, 후백제, 동학농민혁명 등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시는 전라감영을 전주의 미래가 담긴 핵심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전라감영 복원은 단지 건축물 복원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전주의 정신과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라며 “동학농민혁명 등 근대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이자 전라도 번영의 상징이었던 전라감영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핵심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시키겠다”고 말했다.

권순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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