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29> 그해 겨울의 우울, ‘헤어진 다음 날’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29> 그해 겨울의 우울, ‘헤어진 다음 날’
  • 유수경 시인
  • 승인 2020.10.06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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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는 스산했고,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사람들의 눈빛은 불안했다. 성탄절을 앞둔 12월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쓸쓸함이었기에 딱히 캐럴송이 울려 퍼지지 않아도 불평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안은 본능과 감각의 촉수를 타는 법이어서 화산 폭발 직전의 고요가 곳곳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뉴스에선 연일 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칠 외환위기에 대한 경고음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 무렵 어느 누구도 국가부도가 존재한다는 걸 알지 못했으며, 1995년 태국발 자국 통화 위기에 대응하는 주변 국가들의 쌍무협정이 체결되었다는 것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결국 1997년 여름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는 그해 가을 한국을 덮쳤다. 이른바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의 서막이었다.

 

 그렇게 암울했던 시기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인 한 사내가 있었다.

 가수 이현우다.

 재미교포 출신의 이현우는 1990년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싱글 앨범 ‘꿈’(테크노 팝)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로 보면 다소 파격적인 찢어진 청바지와 가죽 재킷, 허스키한 음성과 짙은 선글라스 쓰고 현란을 춤을 추는 그는 그 자체로 젊은 세대들에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주었다. 그 자신도 넘치는 젊음과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10대와 20대의 우상이 되었다. 하지만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야 하는 그 우상은 1993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때론 젊음이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지, 성공은 또 얼마나 냉정한 현실인지 그가 뼛속 깊이 새겨야 하는 날들이었다.

 

 몇 년 후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이현우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을 샘플링한 ‘헤어진 다음 날’을 발표했다. 곡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깔리는 서정적이고, 슬픈 선율의 바이올린 연주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미련을 정제된 슬픔으로 그려냈다.

 사랑 후에 오는 이별은 늘 서툴고, 아프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묻고 싶은 것이다.

 “오늘 하루 그대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그리고 내 사랑이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워 묻곤 한다.

 “날 사랑했나요? 그것만이라도 내게 말해줘요.”

 

 ‘헤어진 다음 날’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가 터진 1997년의 정서와 맞물려 그해 발길이 머무는 곳이면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국가부도로 눈만 뜨면 기업이 문을 닫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가족이 해체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슬픔을 녹여낼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이현우 자신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노래였고, 대한민국의 청춘들도 그의 노래로 위로를 받고 있었는지 모른다.

 

 국가부도의 날들을 살아낸 사람들은 IMF가 끝나면 예전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숱한 이별 후 오는 사랑이 단 한 번도 쉽지 않았던 것처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헤어진 다음 날’은 아직도 슬픔과 동의어가 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우울함을 떨치지 못하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듣는 그을린 음색의 재즈와 바이올린 선율 그리고 그 끝에 이현우의 음악이 있다. 그가 암울했던 시절에 들고 나온 노래 한 곡으로 내 삶이 한동안 같이 쓸쓸해지기도 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암울했던 시절을 견뎌 낸 그때 그 시절의 청춘들은 지금도 ‘헤어진 다음 날’을 명반으로 꼽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딱히 죽을 만큼 아팠던 사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가슴 통증에 시달린다.

 나의 통증은 사랑에 대한 기억이 너무 오래된 탓이리라.

 

 글 = 유수경 시인

 ◆유수경

  시집 ‘갈꽃 스러지는 우리의 이별은’, 동화 ‘소낙비 내리던 날’, ‘못 찾겠다 꾀꼬리’ 외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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