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자격을 검열하는 사회
피해자자격을 검열하는 사회
  •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센터장
  • 승인 2020.09.27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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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영화 한 편을 봤다. ‘69세’. 개봉일 기다리며 관람할 수 있기를 기대했건만 우리 지역에서는 상영관이 없어 어렵게 관람했다. 내가 이 영화를 기다렸던 것은 이미 영화제를 통해 소개됐었고 극장상영 전부터 감독 인터뷰 등 영화에 대한 기사들을 접하며 69세의 여성노인이 성폭력피해자라는 사실이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었다. 주인공역을 맡은 예수정씨의 정갈한 연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이유였다.

 영화의 막이 오르자 “다리가 예쁘세요”라는 남자의 음성과 불안해하며 막아내려는 여자의 움직임 소리만이 블랙화면과 함께 귓전을 울린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주인공 효정이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다가 29세의 남성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효정의 나이 69세. 고민 끝에 피해 사실을 동거 중인 남자친구에게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효정은 고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그 끔찍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며 진저리친다. 가해자의 정액이 묻은 옷가지를 경찰에 제출하지만 늙은 여자를 젊은 남자가 탐했을 리 없다며 믿어주기는커녕 우스갯거리가 되고 만다. “친절이 과했네”라며 경찰은 성폭력 가해를 친절이라 해석하고 그녀를 치매환자로까지 의심한다. 법원에서도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 사이에서 그럴 개연성이 없다며 구속영장은 기각된다.

 조심하지 그랬느냐는 지인의 충고와 그 나이에 몸매가 괜찮다느니 옷을 잘 입는다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도 모두 피해자를 비아냥대는 말들일 뿐이다. “젊은 여자가 고소인이었으면 그 사람이 잡혀 들어갔을까요?”라는 효정의 절규는 더 진하게 다가온다. 69세 여성노인은 ‘여성’으로도 ‘성폭력 피해자’로도 간주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가해자를 구속시키기 위해 지난하게 법정 싸움을 보여주거나 사회의 편견에 맞서 투사로 변신하는 과정도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피해에 공감해주지 않는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세상을 향한 꿋꿋한 외침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피해자의 자격을 부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매우 후진적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사건에서 피고인측 변호인은 법정에서 이혼녀라는 과거를 소환해 ‘혼인한 경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복수심이나 질투심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공격해오거나 이혼녀와 처녀는 다르다는 저잣거리의 조롱도 감내해야 했다고 최근 ‘김지은입니다’라는 책에서 그녀는 담담하게 적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사건이지만 대구에 사는 강정순씨는 파출소에서 2명의 경찰관으로부터 성폭력피해를 당했다. 법정에서는 강씨가 다방여종업원이라는 이유로 가해경찰관들의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무고혐의로 역고소되어 5개월간 구속되었었다. 대법원까지 가서 무고죄 무죄판결을 받아냈지만, 경찰관들의 죄는 다시 묻지 않았다.

 여성노인이기 때문에, 혼인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방여종업원이기 때문에, 성폭력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강요한다. 또한 술에 취했다거나 평소 행실을 들먹이며 피해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기 위해 온갖 이유를 나열한다. 즉 피해자는 원래 보호받을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행적이 이러하니 그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고 피해자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이 합리적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일방적인 주장임을 강조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로 ‘피해호소인’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와 피해상황에 대한 서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스토리를 구성해 의도적으로 상황을 호도하려 하는 데 심각성이 있다.

 가해자에게는 주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스토리를 만들어 준다.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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