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명창 익산국악원 임화영 원장
국악 명창 익산국악원 임화영 원장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9.2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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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혼 명인·명가를 찾아서>

 ◆국악 명창 익산국악원 임화영 원장

 “판소리는 나에게 있어 생명이며, 삶 그 자체 입니다. 죽는날까지 판소리를 연구하고 계승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천부적인 소질로 판소리에 입문해 30여년간 소리꾼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익산국악원장 소월(素月) 임화영(64) 명창의 말이다.

 임화영 익산국악원장은 2007년 제34회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에서는 영예의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국악 명창 반열에 오르고 지금은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 소리꾼으로 입문 배경

 평생 소리꾼 임화영 명창은 1957년 당시 익산군 웅포면 고창리에서 2남 7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부모가 농사를 많이 지어 가정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임화영은 초등학생 시절 국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동네를 찾은 유랑극단의 장화홍련, 호동왕자, 사도사제 등을 들으며 창극 위주로 펼쳐진 공연에 매료됐다.

 창극의 매료로 학교 수업이 끝나면 몰래 천막안으로 들어가 공연을 훔쳐보곤 했다. 이렇게 보고 배운 창극을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들려줬으며 자신의 집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찾아와 판소리, 민요소리, 북소리, 장구소리에 더욱 더 매료됐다.

 갈수록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임화영은 어려워진 가정형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어린 나이에 고무신공장, 가정부, 가발공장 등을 다니며 생업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 나녔다.

 그가 20살이던 겨울,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하면 생활이 좀 나이질까 했는데 그 가난은 결혼 후에도 지속됐다.

 임화영이라는 사람은 그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물뜨기, 뜨개질 등 온갖 부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삭월세 방을 전전하며 아이 둘을 키우는데 어린아이들이 놀고 우는 것이 시끄럽다며 거처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친정집으로 들어갔지만 친정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망연자실하며 살았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 시장 어디에선가 드려오는 소리에 고개 들 들어보니 최란수 국악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때부터 할 일이 없는 날에는 발길이 그쪽을 향했으며, 국악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러한 마음을 남편에게 전하며, 결국 임화영은 국악원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 나의 목표는 국악인

 임화영은 국악원에 입문한 뒤 소리를 배우고 익히기 위해 자신과 싸웠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국악 정통학원을 다닐 수 없어 국악원에서 청소와 잡일을 하면서 흘러나오는 국악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다.

 국악원에 입문한 지 1년이 지나자 지금 고인이 된 성운선 선생의 도움으로 전주에 있는 이일주 선생을 찾았으며, 당시 익산국악원 배기봉 회장의 도움으로 북을 치게 됐다.

 그는 매일 8시간씩 북을 치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심지어 밥을 지으면서, 빨래하면서, 화장실에서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던가 임화영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익산국악원에 판소리를 하는 선생이 공석이 되어 소리를 배우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쳐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국악원 원장은 선생이 구해질 때까지 소리를 가르쳐보라고 재차 제안했다. 그 제안에 임화영은 어린아이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게 됐다.

 1994년 익산국악원 집행부는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임화영을 임시로 둘 수 없고 정식으로 앉히자”고 제안했다.

 1995년 임화영은 심청가 완창에 이어, 1997년 흥부가 완창을 발표했으며, 1999년 적벽가 완창 발표 후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수자가 됐다.

 ■ “영원한 소리꾼으로 살고 싶다”

 임화영은 진정한 소리꾼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2000년, 2001년 전주 대사습에 참가했으나 매번 가사가 막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2005년 남원 춘향국악대전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7년 제34회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에서는 영예의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익산국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초 김연수, 김소희, 박초월, 정광수, 오정숙, 안애란, 남해성, 김수현, 김경숙 명창 등이 익산국악을 대표한 인물들이다.

 국악 반열(班列)에 오른 임화영 명창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수많은 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관객과 청중들에게 많은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익산국악원 임화영 원장은 영등초등학교 판소리 강사를 시작으로 남원 국악예술고, 우석대학교, 원광대학교에서 강사를 역임했으며, 2006년 원광대 초빙교수,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 초빙교원 등 국악 교육에 정진하고 있다.

 또한, 2001년부터 국창 정정열추모공연 및 익산전국판소리경연대회, 익산예술제, 임화영과 함께하는 소리여행, 심곡사 떡목음악회 등 익산에서 열리는 각종 공연과 굵직한 대회를 치르고 있다.

 평생 소리꾼 임화영 명창은 “지금까지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성운선, 오정숙, 최란수, 이일주, 성우향, 남해성 선생님을 절대 잊을 수 없다”면서, “앞으로도 진정한 소리꾼 지도자로 살 것이며,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평생 소리꾼으로 살고 싶다”고 밝혔다.
 

 ■ 임화영 익산국악원장 수상 내역

 1999년 문화관광부장관 지도자 표창
 2002년 제3회 권삼득 추모 전국국악대제전 지도자상
  (문화관광부장관상 수상)
 2004년 익산예총 공연예술상
 2007년 제34회 춘향국악대전 대통령상 수상
 2012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한인회 공로패
 2013년 한국국악대상 공로상 수상
 2014년 익산시민의장 문화장 수상
 2014년 제18회 전북예총하림예술상
 2016년 익산경찰서장 감사패
 2017년 제35회 전국국악대전 지도자상(전라북도지사상)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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