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테이전(contagion)’으로 바라보는 코로나 팬데믹
영화 ‘컨테이전(contagion)’으로 바라보는 코로나 팬데믹
  • 송일섭 염우구박네이버블로거
  • 승인 2020.09.1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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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류사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은 여러 번 엄청난 규모로 일어났다. 유럽의 인구 인구의 절반이 사망한 14세기의 흑사병, 5천만 명이 사망한 1918년의 스페인 독감, 100만 명이 죽은 1957년의 아시아 독감, 800만 명이 죽은 1968년의 홍콩 독감 등이 있었다. 제4차 산업시대로 접어드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감염병 재난은 또 다시 온 세상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2002년의 사스, 2003년의 조류 인플루엔자, 2009년의 신종플루 2011년의 뇌 먹는 아메바 등으로 이어진 재앙이 우리를 위협했다.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 수 2천280여만 명, 사망자 수 79만6천여 명에 이르고 있고, 우라나라의 경우도 확진자 22,391명, 사망자 367명에 이르고 있다(9월15일 기준). 그러나 문제는 코로나19 발생 9개월째이지만, 여전히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고 변종까지 예측되는 상황이니 현재로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세계의 역사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감염병 팬데믹을 오래 전에 예견했음에도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하고 있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바 있다. 영화로는 2012년의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 2013년 김성수 감독의 '감기' 등이 있었고, 소설로는 1998년에 번역 소개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 2013년의 정유정의 '28' 등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예견한 듯한 영화가 있다니 더 놀랍다. 바로 2011년 9월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동시 개봉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전(contagion)'이라는 영화다. 필자는 며칠 전 넷플릭스를 통해서 이 영화를 보면서 큰 충격에서 빠졌다.

 

 ’컨테이전(contagion)‘이란 ’감염병‘ 또는 ’전염병‘을 의미한다. 10년 전에 예고한 ‘대재앙’을 아무 준비 없이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소설가나 예술감독들이 ‘상상한 미래’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던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단순한 일회성 재밋거리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컨텐츠가 시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이 영화에서 감염병은 홍콩에 출장 갔다 온 베스(귀네스 팰트로)‘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다가 죽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아들도 원인을 알지 못한 가운데 기침, 고열, 발작, 뇌출혈로 이어지는 죽음을 맞게 된다. 접촉자들이 감염되면서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미니애폴리스, 시카고, 런던, 파리, 홍콩, 도쿄 등으로 번져나간다.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안전 수칙의 메시지, 요즈음 우리가 익숙하게 듣는 말 그대로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

 

 단 한 번의 접촉으로 60억 인류의 대재난이 일어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미국의 질병통제센터의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 미어스 박사(게이트 윈즐릿) 등이 감염경로를 조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확산차단에 애쓰는 의료진의 모습은 오늘날 코로나 방역에 애쓰고 있는 우리 의료진의 모습이다.

 1일차, 2일차, 3일차 이렇게 시작하던 숫자는 두려움과 불안의 두께가 되고 있다. 확진자가 늘어가는 엄중한 상황에서 엉뚱한 일로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도 있다. 한 블로거가 개나리액이 치료약이라고 포스팅을 하자 이를 얻기 위하여 슈퍼마켓에 난입하기도 한다. 의료진이 감염되고 공항이 폐쇄되고 의원들이 감염되어 의회가 셧다운 된다. 도시가 폐쇠될 것을 미리 알고는 약혼자에게 그 정보를 흘리는 공무원도 있다. 고립된 주민을 위해 전투식량을 배급하는 차량에 뛰어들어 난장판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 위기 앞에서 대의를 생각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어쩌면 그리 비슷할까. 코로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규제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聖徒)와 이웃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종교탄압으로 해석하는 반종교적, 반인간적 행위도 당황스럽다. 백신의 혜택을 누가 먼저 누릴 것인가를 놓고 생일로 추첨하는 방식도 불편하고, 가짜 백신이 암암리에 거래되는 것도 자기만 살겠다는 저열함의 극치 아닐까.

 

 마침내 감염병의 원인이 드러난다. 이 바이러스의 시작은 다국적기업 애임앨더슨의 무분별 개발로 숲이 파괴되면서부터다. 그 숲에 살던 박쥐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인근의 돼지 축사로 날아든다. 축사의 천정에 메달린 박쥐들이 먹이를 먹다가 그 부스러기를 떨어뜨린다. 그 아래에 있는 돼지가 그걸 먹는다. 비위생적인 축사에서 자란 돼지는 식당으로 팔려나가 도축된다. 그 고기를 요리하던 주방장은 누가 부르는 소리에 손도 씻지 않은 채 치마에 손을 문지르고 밖에 나가더니 베스(최초의 희생자)와 악수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컨테이전의 시작이었다.

 

 즉, 깊은 오지에 살던 동물들이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인간과 접촉하게 되었고, 동물에게 기생하던 바이러스가 인간과 만나면서 변이를 일으켜 인수공동전염병이 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탐욕이 다시 인간을 죽이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영화에서 컨테이전(감염병)은 인간이 불러온 것이듯 코로나19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걸린 대재앙 앞에서 우리가 진실로 지켜야 할 대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송일섭 염우구박네이버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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