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기차는 떠나고
오늘도 기차는 떠나고
  • 김저운 소설가·수필가
  • 승인 2020.09.1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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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7>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와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여느 연인들처럼 마음 놓고 만날 수가 없다. 이들의 사랑은 비밀이어야 한다. 존재가 드러나면, 두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안위가 위태롭다.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어서, 변혁을 꿈꾸는 가슴이 뜨거워서, 그들의 순간순간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짧은 만남이 있으면 긴 이별이 있다. 재회의 기약도 없다.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서도 안 된다. 남자가 탄 기차가 카테리니 역으로 간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들은 입맞춤이나 포옹 같은 이별의 애틋함을 나누지 못한다. 희미한 불빛 너머 안개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뿐.

  전 생애를 조국 그리스를 위해 투쟁하였고, 그리스 민속음악을 세계에 알린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반정부활동을 했던 자신의 경험과 당시 주변 상황을 바탕으로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를 만들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20세기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서양음악의 어법과 그리스의 음악적 전통을 접목, 그리스의 정서를 담아내는 작업으로 일관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을 영화로 만든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의 음악도 그가 만들었다. 바닷가에서 춤추던 조르바와 그리스 전통악기인 부주키의 선율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예술 문화뿐 만이 아니라 정치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부터 좌파 정치가로 자유와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한 그리스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 그리스 내전, 1960년대 군사 쿠데타 등으로 체포되어 번번이 투옥되었고, 국외로 떠돌다가 1980년대부터 그리스로 돌아가 국회의원 장관까지 지냈다. 젊은 시절 정치적 투쟁은,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음악으로 나타났다.

  그리스 사람들의 정서는 우리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한다. 한때는 유럽을 지배할 만큼 강한 나라였고 문화적으로도 우월했지만, 외세의 침입과 내분을 오래 겪은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한과 저항의식이 많았을 터. 그리스 음악은 곧 그리스 시민들의 언어이고 한숨이었으리라.

 

  저항의 노래, 하면 얼핏 몹시 거칠고 사납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투쟁과 분노에 그치지 않고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노래가 많다.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그라시아스 아 라비다’가 그렇고, 조금 결은 다르지만 우리의 ‘아침 이슬’, 이탈리아의 ‘벨라 차오’가 그렇다.

  노래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는 보통 그리스의 가수 아그네스 발차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하지만 밀바, 마리아 파란두리, 해리스 알렉시우, 조수미 등 내로라하는 세계의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도 간혹 이 노래를 부른다. 절친 화가의 전시 오픈 때 아예 이 노래를 주문받은 적도 있다. 갤러리 분위기 때문인지 일순 조용해지면서 모두 귀 기울여 준다. 나도 세계적인 가수들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스무 살 무렵엔 레지스탕스 같은 열혈남아와의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했다. 혁명 같은 사랑은 없어도, 혁명 같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이제 많은 세월을 타고 흘러온 내 삶은, 담담한 것들에서 오히려 진실을 본다. 냉정함의 정직에 고개를 끄덕인다. 절제와 침묵을 귀하게 여긴다. 고요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릴 즈음, 간혹 쓸쓸함 같은 게 스멀스멀 발밑으로 기어들면 이 노래가 나를 따라온다. 내가 꿈꾸던 혁명적인 사랑도, 혁명적인 삶도 없었지만,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카테리니로 떠난,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글 = 김저운 소설가·수필가

 ◆ 김저운

  전북작가회의 회원. 작가회의 작품상·불꽃문학상 수상. 소설집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 외 공저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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