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22) 정완희 시인의 ‘낙하’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22) 정완희 시인의 ‘낙하’
  • 강민숙 시인
  • 승인 2020.09.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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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하' 

 - 정완희

 

 가을 깊으면

 뒷산 언덕 키다리 밤나무에서

 밤톨과 밤송이들이 산 아래 밭으로

 일제히 낙하를 시작한다

 나는 밤송이들한테 불만이 많다

 떨어지는 밤송이에 머리를 맞거나

 풀을 뽑다가 두 겹 장갑을 끼고도

 흙속에 숨어 있던 밤송이에 찔려

 손이 가시투성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늦가을이면 콩밭이나 채소밭에 숨어들었던

 밤송이들을 긁어모아 소각하거나

 신우대 언덕의 가시두릅나무 밑동에

 버림용 거름으로 덮어 준다

 가시가 뒤덮고 있어도 어느 틈에 왔는지

 밤톨들은 밤벌레 천지다

 누가 제발 저 밤송이들에게서

 수천수만 년 진화의 매듭을 풀어

 밤벌레 방패도 되지 않는 가시를 없애 다오!

 너도밤나무 마로니에처럼 호두처럼

 

 <해설>  

 산책하다 태풍에 푸른 밤송이와 풋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네 시골집은 들판 한가운데 있기도 하고 산 아래에 있기도 합니다. 산언덕에서 바람이 불면 솔방울이나 밤송이들이 산 아래로 일제히 낙하를 시작합니다. 알밤은 하루만 지나면 밤 껍질과 속껍질 사이 밤벌레 알들이 부화하여 속을 파먹기 시작합니다. 종일 밤송이들이 낙하하면 갈퀴로 긁어모아 신우대 밭이나 가시두릅나무 밑동에 거름용으로 쌓아 둡니다.

 고구마나 서리태 밭을 매다가 흙속에 파묻힌 밤송이에 찔러 손에 밤 가시가 박히고 맙니다. 밤 가시는 피부색과 같아 잘 보이지도 않아서 따끔거리는 위치를 찾아 조심스레 바늘로 파내야 합니다. 살 속의 있는 밤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내 신경도 쓰이고 상처도 잘 낫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잘 알고 있지요.

 시인은 밤 가시는 밤을 보호하는 방패도 못되니까 누가 제발 밤송이의 수천수만 년 진화의 매듭을 풀어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밤벌레들이 밤송이가 솜털처럼 부드러울 때 주사침을 찔러 알을 심어두기 때문에 더 이상 밤 가시는 밤을 보호할 수 없다고 하네요.

 세상살이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숨어있는 밤송이 같은 가시를 만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호두나 마로니에 열매처럼 단단하지 않아서 가끔 상처를 받게 되지요.
 

 강민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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