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전북인들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전북인들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8.2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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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9)

■ 해방 후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과 전북인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중국에서는 2차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동북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 국민당은 심양·장춘·길림 등 송화강 이남에, 공산당은 요녕성, 안동성, 흑룡강성 등 송화강 이북지역에 동북 근거지를 건설했다. 이와 동시에 국민당은 한국인 전부 송환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공산당은 한국인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고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45년 광복을 하기전 중국 동북지역에는 230만명의 한국인이 거주했다. 광복 후에는 80만명 정도가 귀환하고 동북에는 130만명의 한국인이 남게 됐다.

 이 시기 동북지역 한국인의 귀환과 정착은 중국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환경 아래 이뤄졌다.

 국민당은 한국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고, 일본인들과 함께 만주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민당은 1946년 4월부터 요녕, 요북, 안동, 길림, 열하 등 5개 성(省)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가옥 1,757채, 논 1백 7십만㎡ 등을 차압하고 1차로 2,000여명을 추방했다.

 1948년 국민당은 한국인 전부 송환정책 일부를 수정했다. 심양, 요원 등에서 한국인 3만4,713명에게 거주를 합법화하는 체류증을 발급했다. 개인이 소유했던 사업체의 경우 일부를 되돌려 줬으며 농사비용을 대주었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국인들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했다. 공산당은 1948년 8월 15일 한국인들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고 소수민족으로 승인하는 규칙을 제정했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정책은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중국에 정착하는 주요한 원인이 됐다. 만주에서 그동안 자신이 가꾸어 온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중공군이 국민당에 대한 군사적인 공세로 전환하면서 동북 지역은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다수의 피난민과 유민이 발생했고, 이들은 혼란한 만주를 떠나 한반도로 돌아가기 위해 연변으로 몰려들었다.

 같은 시기 연변지역의 한국인들도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귀국을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은 한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중국 공산당은 북한과의 우호관계 있어 ‘특별한 원인’이 없는 자는 귀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전북인이 많이 거주하던 안도현 역시 국공내전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 결과 100호 이상이 거주하던 남도툰(屯)에는 1946년을 기준으로 47호만이 남게 됐다.

  ■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과 토지개혁

 광복 직후 연변지역 한국인은 연변 총인구의 79%에 달했으며, 이 중 농민은 90% 이상을 차지했다.

 광복 후 한국인들의 토지 문제는 중국 공산당에게 시급히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로 대두됐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두 가지 점에 유의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첫째, 연변지역의 한국인은 길림성 전체 인구의 30%인 61만 6,000여명 달했다. 연변지구는 인구 69만명 중 한국인이 54만 4,000명으로 79%를 차지했다.

 둘째, 길림성은 개인소유가 아닌 공유지가 많다는 점이다. 훈춘현, 왕청현, 연길현 등은 30% 이상이, 안도현은 60% 이상이 공지로 조사됐다.

 이렇게 공지가 많았던 이유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만주국과 일본인들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총 경작면적의 1/3에 해당하는 ‘주인 없는 땅’을 농사짓는 이들에게 슬기롭게 배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길림성 정부는 1946년 4월 18일 ‘공지분배에 관한 제3차 지시’를 반포했다. 지주의 토지 몰수, 무상분배, 3년간 매매 금지, 공지분배 이후 토지허가증 발급 등을 기본방침으로 정했다.

 이후 5월 4일 ‘항일전쟁시기 감조, 감식 정책의 혜택을 받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기조로, 만주지역의 토지개혁이 착착 진행됐다.

 연변지역의 토지개혁 운동은 1946년 7월부터 시작돼 1948년 4월에 끝났다. 당시 토지 분배에 참여한 호수는 11만6,681호였고, 분배 받은 인구 수는 54만9,961명이었다.

 1인 평균 약 445㎡~694㎡의 토지를 분배 받았다. 흑룡강성도 토지개혁을 통해 송강(松江) 지역의 한국인 농민들은 1인 평균 228㎡를 분배 받았다.

 요녕성 역시 1인 평균 논 1,190㎡, 밭 1,980㎡를 분배 받았다. 분배 기준은 1인당 기준이었으므로, 4인 가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로 환산해보면, 한 집안이 부자가 되지는 못해도 1년 생활이 궁핍하지는 않을 수준의 분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1948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자 중국 공산당은 한국인들의 토지 소유권을 확보해주기 위해 토지 집조(執照)를 발급해 주었으며, 토지에 대한 임차·대여·매매 등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황무지 개간과 논 개간을 권장하고 일정 기간 세금을 납부하지 않도록 했다.

 이로 인해 연변지역을 비롯한 공산당이 차지하던 해방구역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한국인들은 국내로 귀환하지 않고 중국에 정착하게 됐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적극 협조했다.

 ■ 토지개혁 이후 후폭풍

 마침내 갖게 된 ‘내 땅’이 전북인들을 만주에 남아 있게 만든 요인은 아니었다. 가족, 더 나아가 ‘아버지의 산소’가 남게 된 이 땅을 떠날 수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광복 이듬해 절반 이상의 마을 사람들이 한국으로 되돌아갔소. 나의 형님은 어머니를 설득시켜 고향으로 가자고 했소. 그런데 어머니가 반대하는 것이 아니겠소. 아버지의 산소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버리고 가는가. 한 치 땅도 없는 고향에 가면 또 다시 남의 땅을 부치면서 머슴질을 하지 않는가. 그러니 갈려면 너희들끼리 가거라. 어머님께서 고집하시사 우리들은 그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소” 정해련(전북 무주 출신, 1927년생)

 토지개혁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초기 인민자들의 경우 자신과 가족들의 노력에 의해 적지 않은 땅을 확보하게 됐다.

 중국 공산당은 초기 토지개혁을 실시하던 시점, 기준보다 많은 땅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지주는 아니더라도 ‘중농’으로 분류해 중농의 땅과 재산을 몰수해 재산이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한 판정은 해방 직후 충분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공산당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사라져버린 식량, 옷가지, 가재도구 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김옥자(전북 김제 출신 1931년생) 할머니 역시 몰수 대상자가 됐다.

 “우리 것도 다 청산해 갔지요. 그때 우리는 무주툰에 있고 지역 정부는 영경에 있어 우리 아버지가 지역 정부를 찾아갔는데… 고등창에서 살던 장 특파원이라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즉시로 무주에 지시를 내려보내 우리 집을 청산한 걸 시정하라고 했답니다. 청산해 돌려올 것이 얼마 있습데까? 남들이 없앤걸 어쩌겠어요? 그래서 다시 회복을 받았어요. 우리가 한 고생을 어떻게 다 말하겠어요?

 토지개혁이 끝난 후, 중국 공산당은 적극적인 집단 농업체제를 가동했다. 마을별로 인력을 동원하는 호조조(互助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초기 공산당 정책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보상을 제공하는 ‘공산주의식’ 모델을 채택했다. 그러나 생산량에 문제가 생겼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시간만 때우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작업의 결과물이 신통치 않았다.

 결국 공산당은 다시 일부 사유재산의 소유와 결과물에 연동된 보상 정책을 실시했다. 전북인들의 성실함은 빛을 발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전북인들은 그 성실함으로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

 ■ 근현대사 소용돌이, ‘전쟁과 문화대혁명’

 우리는 해방은 됐지만 중국 동북아 지역은 좀처럼 평화를 얻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격돌하는 국공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를 공격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1950년 6월 25일 벌어진 전쟁이다.

 류영석(전북 익산 출신 1924년생)씨는 20대 초반 중국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을 모두 겪었다. 국공내전에서는 만주지역으로부터 중국의 반대쪽 끝인 하이난다오(海南島)와 쓰촨성(四川省)까지 행군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결정으로 중국이 중공군을 대거 한국전쟁에 투입했다. 류석영 씨는 자신이 받은 훈장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며 설명했다.

 “부상을 여러번 당했지. 제일 심한 것은 이 다리에 당한 부상이었소. 미군 비행기 폭탄에 얻어 맞았소. 그래서 나는 2등 을(二等 乙) 잔폐 군인이 되였소. 잔폐금이 좀씩 나오지”

 ‘잔폐군인’은 우리나라의 상이군인이다. 류영석 씨의 경우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중국 국가로부터 약간의 연금을 받게 된 것이다.

 전쟁이 잠잠해진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중국 전역을 강타했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10년 세월 중국대륙을 휩쓸면서 거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러한 광풍 속에서 전북인들이 무사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용구 씨는 사상 개조 운동 대상이 되어 고초를 겪었다. 농사를 짓던 그를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으로 몰았다.

 “그 무슨 조선특무 라고 끌려 다니면서 일년 동안 노동개조를 하였소. 그 무슨 조선서 특무로 파견되어 들어왔다나. 아무리 억울해도 누가 변명을 해주는 사람도 없는데”(전북 부안 출신 1930년생)

 문화대혁명은 모두를 의심하고, 모두를 괴롭혔다. 그렇게 지난 10년의 세월은 아직도 중국 사회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 다시 찾은 평화, 삶으로 복귀

 1978년 문화대혁명 시기가 끝나고 동북지역도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어왔다. 안도현에도 ‘농업생산책임제’가 실시되며, 논과 밭의 면적이 증가하고 대형 농기계가 들어오며 출하되는 농산품의 양 또한 증가했다.

 특히, 남도촌의 경우 1998년 안도현 지원하에 관개수로를 수축(修築)했다. 문화대혁명 이전 남도촌의 인구당 수입은 200위안 이었다. 그러나 농업생산책임제 실시 초기 인구당 수입은 700위안이 되었고, 1998년 2,400위안으로 증가하며 20년 만에 3배 이상이 증가됐다.

 농업생산량의 증대와 함께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또한, 조선족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높은 학구열로 인해 북경대학교를 비롯해 중국 각지의 우수한 대학에 다수가 진학했으며, 중국사회에 진출하고 각계각층이 중요한 자리에 앉았다.
 

이석형 연구원 “중국 대륙 조선족, 우리의 민족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인들의 중국 정착과정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정치상황에 따라 전쟁에도 참여했으며, 숙청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슬기롭게 이겨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을 조선족이라 부르며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사람으로 오해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조선족 일부는 100여년 전에는 전북에서 거주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주했습니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 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현재 중국 대륙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은 우리의 민족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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