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3> 허균의 귀양살이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3> 허균의 귀양살이
  • 이창숙 원광대 초빙교수
  • 승인 2020.08.23 17: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소부부고』권26, 「도문대작」편
『성소부부고』권26, 「도문대작」편

 우리에게 『홍길동전』으로 잘 알려진 허균(許筠, 1569~1618), 그는 둘째 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후처 소생이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형제들의 수려한 재능 속에서 자랐으나 서류(庶流)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생각을 동조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술집과 기생집을 드나드는 계기가 됐고 게으르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을 잘 만나 마음의 안정을 찾고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부인을 잃고 갓 태어난 아이마저 잃게 되니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슬픔을 이기기 위해 낙산사에서 승려들과 교유하며 시를 지으며 보내기도 하였다.

  허균에 대한 당시의 평가도 분분했다.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박학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행실이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지분간 못하는 소인배로 여기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중심보다는 주변의 편에서 그들의 생각을 지지하며 불우한 사람들과 벗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는 정치적으로 사화 및 당쟁으로 인하여 극도로 혼란하였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사회를 극도로 피폐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폐단이 더욱 부각되었던 시기이다. 허균도 유배를 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살지만 결국 광해군 때 역모죄로 처형을 당했다.

  허균은 42세에 조카를 급제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 투옥되고 1611년 전라도 익산 함열현에 유배되었다. 아래 시는 이때 쓴 것으로 「화백시 和白詩」에 실려있다.

 

 “손님을 물리치고 홀로 앉아”

 

 향 피우고 책을 펴니 고요하여

 신선의 집인 듯 한갓지구나.

 

 섬돌 쬐는 봄 햇살 매화송이 애태우고

 창을 스치는 샛바람 버들꽃 떨구네.

 

 벼루 마른지 오래라, 붓을 던져버렸고

 초강이 막 익으니 용단차 맛을 보네

 

 궁벽하여 오가는 길손 없을 거라 말을 마오

 아침 저녁으로 드나드는 산벌이 있다오.

 

  유배 당시 허균의 나이 42세로 중국의 백거이가 강주로 유배 간 나이와 같아서 백락천의 시에 화운하다는 의미로 ‘화백시’라 했다. 유배지의 한적한 집에서 책 보고 글 쓰는 일도 잊은 채 차 맛에 빠져 신선이 되었으니, 궁벽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도 자연과 벗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허균의 모습이다.

  허균의 「도문대작 屠門大嚼」은 함열현 귀양살이 때 기존의 초고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쓴 요리책이다.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을 벌린다’는 뜻으로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음에 대한 맛을 상상하는 것인데 참으로 솔직한 표현이다. 허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허엽 덕분에 선물로 들어온 진귀한 음식을 많이 먹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 생각났을까.

  차에 대해서도 한 구절을 남긴다. “순천에서 나는 작설차가 가장 좋고 그 다음이 변산에서 나는 차이다(茶 雀舌産于順天者最佳 邊山次之)”라고 했다. 아마 변산의 차 맛을 먼저 보았다면 변산의 차가 제일이라 했을 법도하다.

  허균은 함열 귀양살이가 풀리자 부안에서 기거한다. 부안현의 바닷가 근처, 변산의 우반 골짜기 정사암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하고 싶었던 것일까.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