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9) 성영희 시인의 ‘꽃무릇’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9) 성영희 시인의 ‘꽃무릇’
  • 강민숙 시인
  • 승인 2020.08.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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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무릇’

 

 -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에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해설>  

 누구나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아픔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고 산사를 찾아가는 발걸음엔 온갖 상념들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등산을 하거나 걷는 사람들 속에서 시인 혼자서 쓸쓸한 마음으로 걸어 온 길을 돌아봅니다.

 사람 사는 세상뿐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물속에 사는 물고기도 각기 그들 세계마다 불협화음이 있겠지만 홀로 살기보다는 더불어 무리 지어 삽니다. 꽃무릇이 무리 지어 절간 뜰을 물들이고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도 물들이고 있습니다.

 선운사 도솔산 기슭 어디쯤 울창한 고목 사이로 펼쳐 진 꽃무릇은 붉은 왕관의 군락이 너무 도 황홀하여 혼자 여행 온 사실마저 잊네요.

 어디론가 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심사가 어디 사람뿐이겠어요? 꽃들도 나무도 천년고찰 부처님도 가끔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지은 꽃무릇이 불심에 든 소나무까지 어디론가 끌고 가는 듯 하네요.

 
 

강민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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