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고을 남원에서 우리 민족의 얼을 찾다
사랑의 고을 남원에서 우리 민족의 얼을 찾다
  • 양영아 수필가
  • 승인 2020.08.20 18: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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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2 (8)남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는개가 마치 파스텔을 칠한 풍경화처럼 신비스럽다.

어린 시절 떠난 고향 찾아가는 길은 괜스레 가슴 설렌다. 지나칠 수 없어 혼불 문학관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서도역은 강모가 여기 어디쯤에서 기차를 기다릴 것만 같은 환영에 젖게 한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는 문학을 향한 최명희의 집념은 대단했다. 혼불 문학관에서 그녀의 삶을 떠올리며 넓은 마당을 나와서 덕과면에 들어섰다.

 ■선열들 불굴의 애국정신, 탑에 새기다

마을 한 쪽에 싱그러운 소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어 푸르름을 더했다. 풋풋한 풀밭 가운데 쓸쓸히 서 있는 ‘남원 3·1 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을 대하니 왈칵 설움이 북받쳤다. 덕과면 만도리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소팔백蘇八伯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임실 출신 이석용이 의병을 모집하자 한걸음에 달려가서 의병이 되었다. 독립군에게 군자금은 필수였다. 전답과 소를 저당 잡히고 조합에서 팔백 냥을 대출받아 군자금으로 쾌척한 소팔백을 보고 많은 사람이 군자금 조달에 동참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죽음을 당했던가. 매년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에서는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기리고 후세들의 애국심 함양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남원 3·1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호암 시비공원’은 덕과에서 하율 천 시냇물을 거슬러 2Km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경명 의병장을 비롯한 임진, 정유재란 때 조선 국운을 일으키려는 선현들의 인, 의, 예, 지 정신을 표상으로 삼고자, 그들의 시를 모아 돌에 새겨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남원 학생 종합회관 앞에도 ‘남원 항일운동 기념탑’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그날의 슬픔을 말해주고 있었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제의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주생면 사계 정사 입구에는 ‘항일 독립 만세운동 순국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4·4 만세 운동 당시 순국한 금지사람 방극용 일가 남양 방씨 다섯 명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남원시의 산야를 달리는 차 창 밖으로 어느새 익은 봄의 빛깔이 오월의 찬란함을 신록에 뿌려주고 있었다.

 

■만인의 충정 이곳에 영원히 살리라

만인의총을 찾았다. 아직도 옛 남원 역 부근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만인의총이 향교동의 10만여 제곱미터의 넓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어 무척 다행스러웠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4일 동안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민?관?군 1만여 명의 의로운 충절을,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가슴아파하며 모신 무덤이다.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을 올려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내 조국 내 고장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선조들이여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 위해 목숨 바쳐 지켜낸 우리 고장 남원성

일본 놈 만행 저항하는데 양반도 노비도 똑같은 나라 사랑이었다

죽창 들고 총칼에 대항했던 위대한 님들이여

만인의 고귀한 희생정신에 빛나는 대한민국

오늘 우리 여기에 모여 옷깃 여밉니다

이제 만인의총에서 고운 숨결 쉬소서

우뚝 선 충혼탑이 슬픈 영혼들을 지켜드립니다

 

■사랑의 장소 광한루가 감옥이었다니

숨이 막힐 듯하여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 이야기나 들어볼까 하고 광한루에 들어섰다. 오작교 다리 아래 흐르는 연못에 커다란 잉어의 유영이 한가롭고 정자의 그림자가 그림처럼 고왔다. 1419년 황희 정승이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건립하여 세종 16년에 중건된 후 정인지에 의해 광한루라 개칭되었단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누각을 1626년 복원했는데 ‘이 도령과 성 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만 있는 줄 알았던 그곳에 일제의 만행 흔적이 남아있어서 놀라웠다. 문화도 모르는 무식한 왜놈들의 횡포가 여기에 펼쳐졌다니 가슴이 시렸다. 일제 강점기 때, 누각 마루 위는 재판소로, 누각 마루 밑은 감옥으로 사용되었단다. 문화조차도 말살하려 했던 만행이 개탄스러웠다.

 

■왜적의 횡포가 아무리 심했어도 우리 민족의 풍류는 막지 못했다

광한루를 나서니 저만치 넓은 요천수 건너 절벽에 아름다운 금수정錦水亭이 날아갈 듯이 보였다. 노암동의 금암봉 중턱에 있는 금수정은 1936년 신사 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정자다. 일제강점기에 시민들은 신사 참배를 하러 가는 척하다가 이곳에 들려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한 금수정은 기둥 기초석이 내려앉고 건물 기둥의 뒤틀림 등으로 붕괴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이에 남원시는 금수정을 해체하고 2020년 5월 보수를 완료하였다. 보수공사가 조금만 늦었어도 남원의 고유문화유산을 잃을 뻔했다고 문화재 전문가들은 말한다. 금수정은 남원팔경 ‘금암 어화錦岩漁火’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불행을 승화시킨 심수관 가문

남원 춘향 테마파크에 오르니 아픈 도공의 역사를 찬란하게 승화시킨 ‘심수관 도예전시관沈壽官陶藝展示館’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잡혀가서 일본놈들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심수관가는 민족의 얼을 잊지 않고 살려 도자기를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12대 심수관부터 15대까지 심수관가의 기증 작품 13점을 전시한 코너와 영상실이 있었다. 사쓰마 도자기의 본향인 남원에 전시하여 남원시민과 일본 심수관가 그리고 많은 도예인에게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로운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며 일본 도자기를 눈물로 탄생시킨 불쌍한 우리 도공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떠올리며 하늘을 본다. 어느새 돌아서는 고향의 하늘이 노을로 붉게 번졌다. 서럽고도 고마운 마음에 나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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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세 2020-08-22 21:01:32
남원은 우리 서민문학 춘향전 무대이고 藝鄕이라는 것 외에도 왜적에 대한 항쟁이나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라~ 우리 고장의 보물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