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는 시인에게 영혼의 집
詩는 시인에게 영혼의 집
  • 전재욱 시인
  • 승인 2020.08.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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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S 엘리엇은 20세기를 황무지에 비유했다. 초목이 없는 사막인가. 문학의 영원한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성인 몸과 식물성인 영혼을 모은 몸이다. 몸이란 말은 인간에게만 쓰이며 동물은 육신과 영혼을 모은 몸이 아니다. 식물성인 영혼을 황무지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人)은 곧 글(文)이다. 사람과 글, 곧 인문(人文)은 한 몸이다. 인人은 공간에 존재하는 상형이고, 문文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형이다. 글월文자는 사람의 몸에 심장을 그려 넣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라 한다. 글文은 사람의 심장 곧 마음이다. 공간에 존재하는 육신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영혼이 곧 인간이며, 그러한 이미지가 인문人文이고 시詩인 것이다. 하이데커는 시를 ‘존재의 구현’이라고 했다.

  詩는 언어 예술이다. 예술의 藝자는 “사람이 나무를 심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열매는 나무에 맺힌 결실이고, 시는 사람이 지은 열매이다”. 예술은 나무에 맺힌 열매처럼 자연스러운 예술작품을 짓는 기술이 된다.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것은 자연이며 사람이 시를 짓는 것은 人爲이다. 자연의 열매가 거짓없는 생명의 창조이듯 예술작품도 거짓없는 진실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詩는 영혼의 꽃이며 열매이다. 꽃은 식물이 피워내는 생명의 발화이며, 열매는 그 꽃이 맺은 결실이다. 인간의 영혼이 식물성이라 생명의 꽃을 피우고 그 결실인 예술작품이란 열매를 맺는다. 식물성인 영혼은 동물성인 육신처럼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공자는 이를 일컬어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이라 하였으며 육신은 죽으면 움직이지 않고, 영혼은 잠들면 활동하지 않으나 이 잠든 영혼을 깨워 일으켜 활동하게 하는 것을 興이라 하고 “시에서 영적 感興이 깨어 일어나고, 그 감흥을 禮라는 형식으로 세우고 영적 교감이라는 즐거움(樂)에서 생명이 완성된다”고 했다. 그래서 시적 감흥속에 사는 시인의 영혼은 육신이 죽은 뒤에도 떠돌이가 되지 않고, 시 속에 영원히 살면서 독자와 만나고 있다. 시는 시인의 영혼이 살고 있는 영혼의 집이며 천상의 언어를 인간의 말로 노래 한다.

 전재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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