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와 지붕 위의 소들
장맛비와 지붕 위의 소들
  • 정영신 전북소설가협회 회장
  • 승인 2020.08.12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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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시인의 <묵화(墨)>라는 시이다. 할머니와 물 먹는 소가 주인공이다. 시인은 하루의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노을을 배경삼아 할머니와 소가 서로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시의 제목을 <묵화(墨)>라고 했다. 또 300만 명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던 다큐 영화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와 40년을 함께한 늙은 소의 애잔한 마지막 이별 이야기도 또 다른 한 폭의 <묵화(墨)>다.

  이 김종삼 작가의 <묵화(墨)>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석양이 지고 땅거미가 산 아래까지 내려앉고, 이제 막 하루 농사일을 마친 큰 소가 마른 목을 축이느라 허푸 ~ 허푸~ 찬물을 삼킨다. 그 소 곁에 등이 굽은 할머니가 연신 물 먹는 소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오늘 이 하루도 나와 함께 수고했다고, 하루 종일 논밭을 가느라고 너도나도 발잔등이 부었다고, 그렇게 너도나도 오늘 하루도 고생이 많았다고……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너에게도 나에게도 적막한 밤이 찾아왔다고, 그러니 이제 너도나도 다리를 좀 펴고 편안하게 깊은 잠이 들자고……할머니로부터 수고했다고, 발이 많이 부어서 미안하고 오늘도 고생이 많았다고…… 이처럼 등이 굽고 다리가 굽고 발등이 부은 할머니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은 누런 소는 너무 고맙고 그 큰 가슴이 뭉클해져서 튼실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음머~ 음머~ 할머니도 고생이 많으셨다며 큰 울음소리로 응답한다. 할머니에게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이 소는 몇 년을 동거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특별한 의미의 자식이며 가족이다.

 소는 예로부터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생구(生口)는 한 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 것으로 소는 한울타리 안에서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한 식구나 다름없기 때문에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또한 소는 예시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성시 여겨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소의 발굽으로 점을 치기도 했다. 소는 ‘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 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겉으로 보이는 그 행동은 더디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행하기 때문에, 소가 흔들림이 없이 여유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보면서 세파에 좌지우지하지 않는 올곧은 도인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농사가 가장 중요한 생업이었던 시절 소가 없으면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소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소를 잃었다가 기적처럼 되찾아서 기뻐하는 소주인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구비문학에 많이 등장을 한다. ‘살림이 다 망해도 소는 봄에 판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집이 다 망해서 쓸 돈이 없어도 소는 가장 나중에 팔아야 한다는 의미로 농가에서는 그만큼 소가 곧 재산 일부였고, 그 소를 조상으로 여길 만큼 우리 민족에게 소는 귀한 존재였다.

 75년 만에 기상관측 이래 역대 최강의 폭우가 연일 쏟아졌다. 휴대폰에는 비 피해가 있으니, 산사태가 있으니, 침수 우려가 있으니, 붕괴 우려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등의 재난 안내 메시지가 수시로 왔다. 우리 전북도 7일부터 9일 사이에 평균 강수량이 338.3㎜를 기록했고, 남원 432.6㎜, 순창 544.4㎜, 전주가 400㎜가 넘는 등 집중호우가 쏟아져서 도로가 유실되고 주택이 침수되는 등 많은 비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재난방송 속보 뉴스를 시청하다 보니 섬진강댐이 무너진 구례의 한 마을 여기저기 물이 넘실거리는 지붕 위에 수 십 마리의 소떼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틀 뒤 물이 좀 빠지고 마당이 드러났지만 많게는 1톤에 이르는 큰 소들이 내려오지 못해 울부짖는 소리가 그 축사의 주인과 지켜보는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결국 포크레인 등 중장비 등이 동원되어 무사히 그 소들을 다 구출해 주었다. 그 중 암소 한 마리는 구조대원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해서 애타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배 안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 암소는 어쩔 수 없이 마취총을 쏘아 잠이 들게 해서 겨우 구출을 해 주었고 마취에서 깨어나자 조용히 혼자서 쌍둥이 새끼소를 출산하여 소 주인과 구조대원, 이 소식을 뉴스로 접한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또 다른 마을에서는 마을로 물이 밀려들자 축사 주인이 급히 몸만 나오면서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축사문을 열어주었는데, 일부 소떼들이 밀려드는 큰물을 피해 도로를 달려 근처 사성암으로 올라가 겨우 살아남았고, 어떤 소는 물살에 몸을 맡겨 하동에서 100리나 떨어진 밀양까지 떠내려갔다. 다행히 이 소의 귀에 붙은 식별코드로 확인해서 기적처럼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홍수라는 75년만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지붕 위로 높은 산 위의 사성암으로, 하동에서 밀양천까지 피해서 살아남은 우직한 소들의 지혜를 보면서 결코 성급하게 서두르는 것보다는 저 소들의 우직함과 과묵함에서 또 하나의 소중한 삶의 지혜를 배워본다.

  정영신<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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