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우리 민체를 개척한 선구자, 효봉 여태명을 만나다
우리 글·우리 민체를 개척한 선구자, 효봉 여태명을 만나다
  • 이휘빈 기자
  • 승인 2020.08.10 1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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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혼 명인명장

 붓과 먹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이치를 다스리고, 예술을 빚어내는 서예(書藝). 예로부터 유명한 서예명인들이 이름 높았던 전북에는 이제 효봉(曉峰) 여태명(余泰明·64) 원광대학교 교수가 있다. 그가 쓴 글씨는 전주 톨게이트, KBS 예능 ‘1박2일’, 전주지방법원 문패, 2018년 남북정상회의 표지석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 교수는 서민들의 글씨인 ‘민체(民體)’의 발굴자로도 유명하다. 묵향 가득한 여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주>

 

 원광대학교 서예관에서 묵향과 함께 있던 여 교수의 손은 단단했다. 진안 출생인 여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잡은 붓이 나를 서예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유년은 서예와 더불어 미술도 함께했다. 중학교에서눈 수채화를, 대학교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했는데 그 동안에도 서예 붓을 놓지 않았다. 전주대학교에서 수학하던 그는 학원을 운영하면서 서예, 동양화, 전각, 그림 등도 함께 섭렵했다. 이에 대해 여 교수는 “서예는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선배들에게 혼났지, ‘너 뭐 이렇게 다른 걸 하고 다니냐’고. 하지만 서예는 정말 모든 것이 될 수 있어요. 한글, 한문, 전각, 문인화가 모두 한 곳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생활 속의 작은 소품부터 액자까지, 물처럼 변화하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여 교수는 예술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우리 생활 속에 안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뜨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우리 서단 풍토에 캘리그라피라는 개념을 이끈 선구자로, 한국 캘리그라피 디자인협회 초대,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98년에는 한글 민체 폰트 등에도 나서기도 했다. KBS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역시 그가 만든 ‘효봉 개똥이체’로 쓰였다.

 여 교수의 새로운 시도에는 전통에 대한 탐구가 깊이 배어 있다. 그는 젊을 적 한자 서예를 배우던 도중 한글 서예에 대해 의문점을 가졌다. 그가 모으던 옛 소설 필사본, 도자에 각인된 한글, 서간의 글씨의 한글들의 아름다움, 그것은 궁중에서 쓰던 한글 서예 ‘궁체(宮體)’에서 없던 ‘사람의 삶’이 있었다는 것.

 “한글서체의 기본은 훈민정음이고, 훈민정음은 반듯함이 특징입니다. 사람이 똑바로 서있는 모습, 즉 부동자세가 있어요. 궁체는 궁궐에서 많이 사용된 특징인데, 궁인들이 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듯이 고개를 숙인 모양이 특징이지요. 반면 민체는 궁궐 밖의 백성들이 사용한 글씨입니다. 술 한잔을 걸친 뒤 저잣거리에서 허리를 약간 뒤쪽으로 펼친 백성의 모습들이 있어요. 특히 민체를 보다보면 많은 백성들의 표정과 의미가 숨쉬고 있습니다. 글씨의 두께도 다른데, 그 획에 감정 하나하나가 담겨 있지요”

 여 교수의 작품들은 한글을 소재로 새로운 발상을 펼쳤다. 자음과 모음을 근원으로 삼아 펼치는 그의 전시는 어찌 보면 그의 문인화와 달리 발상 자체가 참신하다. 그의 화폭에서 ‘ㄱ’과 ‘ㅏ’는 별개로 존재한다. 이 창의성에 대해 여 교수는 ‘글과 그림은 하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서화동원(書?凍原), 서예란 문자를 가지고 하는 예술인데 문자는 본래 그림과 같다는 것.

 “서예란 글씨의 예술 그 자체이지, 피상적인 법(?法)이나 도(?道)가 아니지요. 예술은 법과 도는 수단적 방법이나 이상적 목적이 될 수는 있어도, 유어예(遊於藝 ), 논어에서 말한 ‘예술에서 노닐다’가 될 수 없어요. 획과 획 사이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글을 단순한 문자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넓힐 수 있는 거죠”

 여교수의 철학은 그의 연구에서 드러난다. 1989년 처음 원광대학교 서예학과를 설립하고 민체에서 연구할 때, 고대의 민체들이 서로 다름을 발견했다. 호남지역 민체는 유유자적과 낙천적인 모습, 영남지역의 민체는 우스꽝스러움과 촌스러움, 뒷날 중국 동북지역 민간의 민체에서 보는 활달함과 힘찬 기상등을 발견했다. 민간 서체가 빚어온 힘이었다.

 여 교수는 이를 위해 한중수교 전인 1989년부터 중국과 교류하고, 1999년에는 1년간 루쉰미술학원 객좌교수에서 중국미술을 연구했다. 여 교수는 1989년부터 작년까지 중국을 오가며 탁본, 금석문, 민체 등을 수집하고 문화지역들을 답사하는 등 중국문화연구에 몰입해 주변인들로부터‘중국통’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그의 민체는 전주를, 그리고 우리 민족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기도 했다. 먼저 전주 톨게이트의 현판 역시 여 교수의 작품이다. 전주시의 요청에 들어오자마자 약 30장을 썼다는 여 교수는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다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가장 좋은 글씨 2장을 선택했다는 것.

 “최종 선택된 두 중 첫 번째 글씨는 서울에서 전주를 들어가는 방향으로 걸리게 됐는데, 어머니를 표현한 모음을 크게 적었죠. 이는 엄마의 큰 가슴, 즉 따뜻한 가슴에 안기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두 번째 선택된 글씨는 전주에서 서울방향으로 나가는 곳에 있는데 모음을 작게하고 자음을 크게 했어요. 아들이 서울에 올라가 크게되고, 어머니는 아들이 성공해 돌아올 것이라는 소망이 배어 있죠.”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함께 연 남북 기념 식수 글귀, ‘평화와 번영을 심다’에 대해서 여 작가는 당시의 정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4월 21일 인사동으로 가던 도중 청와대에서 온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했다는 것.

 “기차 타던 도중 갑작스럽게 받은 의뢰에 심장이 덜컹했죠. 하지만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데 내가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해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총 3안을 준비했는데, 첫 번째로는 판본고체(용비어천가), 둘째로 판본필사체(완판본), 셋째로 민체를 준비했어요. 결국에는 민체가 선택됐습니다. 글을 쓰고 정상회담까지 이 사실을 꾹꾹 참았는데, 4월 27일 전국에서 전화가 오더라고, ‘지금 남북정상회담의 저 글씨가 네 글씨냐’ 그제서야 마음이 가벼워지더라니까!”

 호탕하게 웃는 여 교수의 웃음은 그의 글처럼 자연스럽고 힘있었다. 그는 앞으로 남은 정년을 채운 후에는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정리하고, 개인적으로 박물관을 만들 것도 꿈꿨다.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책과 서예를 수집하고, 필사본들도 열심히 모았는데 아직 연구를 다 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정년 퇴임 후에는 그동안의 민체를 다 정리해 이 연구를 후세에 전달하고 싶어요. 모아놓은 자료는 개인 박물관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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