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 이정희 전주대 평교 미술아카데미 교수
  • 승인 2020.08.09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유(freedom).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행복해진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다. 자신을 최고의 가치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다’, ‘자유를 만끽하다’ 등의 수식어를 붙여 표현하고 있다. 인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억압과 독재에 대항했다. 기꺼이 목숨까지 내던졌다. 앞으로 그럴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감히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한가?”라고. 하던 일을 멈추고 어떤 대답을 할지 생각해보자.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필자 역시 선뜻 “네~”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한국사람은 구조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느끼기 쉽지 않다. 태어나서 오늘까지 사회적 지위가 높던 낮건,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남녀노소 불문하고 유·무형의 관계들에 꽁꽁 묶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의 시선과 판단을 중시하는 ‘타의적사고’, 개인의 능력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줄(Line)사회’ 등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하다. 결단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진 것을 포기하는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근로자 연간 근로시간은 2018년 기준 1,967시간에 달한다. OECD 회원국 중 5번째로 길다. 많이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야근을 미덕으로 여기는 직장문화가 우리사회에는 잔존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노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세대 간 차이도 심하다. 심지어 노는 것조차 어떻게 해야 ‘제대로 놀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정부는 국민이 최소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을 보장하기 위해 주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제 등을 다양한 제도를 확대 시행했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 우리 주위에 제대로 쉬며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은 자유, 쉼(休)을 가족과 고급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 고급호텔에서 휴양하는 것, 제대로 장비를 갖춘 스포츠 활동, 해외여행 정도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쉼’의 의미를 한자에서 찾아보자. 쉼(휴, 休)은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직업적이든, 환경적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쉰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뒤처질까 불안하다. 쉴 때도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 타의적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누가 뭐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자유의 존재를 모르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다.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일 온종일 홀로 방에 스스로 갇혀보자. 가장 편한 자세로 쉬며 자신만을 생각해보자. 생각조차 귀찮다면 그냥 시간을 느껴보자. 이 또한 정말 어려울 것이다. 잡념에 지배당하기 쉽다. 그렇다면 아예 잡념을 즐겨보자. 상상의 나래는 시공을 초월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와 해방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유는 남으로부터 구속이나 피해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역으로 남을 구속하거나 피해를 준다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반드시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 책임이 동반되지 않으면 방종이 되면 사회는 무질서해진다. 경계를 지키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려보면 어떨까.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휴가철을 맞아 여행계획도 수립해보지만 여의치 않다. 이럴수록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여행, 또는 길여행을 떠나보자.

 이정희<전주대 평교 미술아카데미 교수/지후아트갤러리 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