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82> 차, 알아차림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82> 차, 알아차림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0.08.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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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과 내일, 우리는 어느 쪽에 더 충실한가. 내일에 대한 거창한 설계를 위해 오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사소한 일들 속에서 내일를 챙기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며 밥을 먹을 때 조차 ‘다음 일’을 위해 마음이 급해져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다. 이러한 마음은 적절치 못한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나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 지금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다. 다음 일에 대한 마음이 오늘의 행위보다 위에 있어 생긴 일이다.

  만약 식사를 마치고 ‘다음 일’이 차 한잔의 여유를 갖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면 실제 어땠을까. 이번에도 마음은 놓치고 밀린 일과 휴대전화 인터넷 검색 등, 다음 일을 생각하느라 손에 들린 찻잔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음에 가려 매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 순간은 삶 속에서 빠져나간다.

  잠깐 기다려!! 이 일만 끝내놓고 그러면 행복해질 거야. 이 일이 무엇일까. 학위, 직업, 집, 돈 등 이 일이 끝나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다.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행복하길 원한다면 지금이 평온해야 한다. 다음은 희망에 불과하다. 행복은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의 경험 즉 지금을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 다음의 행복을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알아차림은 마음이 가진 본래의 능력이다.

  차는 고대부터 수신과 관련하여 많은 종교인과 예술가 문인들이 애용하였다. 중국의 북송때 인물 진사도(陳師道 1053~1101)는 시인이다. 그는 차를 마시고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초연하게 사는 사람들의 공부 방법의 하나이고, 청빈함을 정진하는 선비들의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없다’고 하였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이들이 차를 예찬하였다.

  초의(1786~1866)는 『동다송』에서 차를 마시는 법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고 했다.

 

  차를 마실 때 사람이 많으면 어수선하고,

  어수선하면 아담한 정취가 사라진다.

  혼자 마시면 심묘한 경지에 들고,

  둘이 마시면 좋고, 세 넷이 마시면 정취가 있고,

  대여섯이 마시면 들뜨게 되고,

  예닐곱이 마시면 그저 마실 뿐이다.

 

  차는 그 마시는 방법이 다양하다. 마시는 사람의 수에 따라 그 오묘한 맛이 차이가 있다. 혼자 마시면 심묘한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심묘한 경지가 무엇일까. 다시 말하면 알아차림이다. 차를 마시면 삼매경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둘이 마시게 되면 좋다는 의미는 차를 놓고 마음을 함께 나누는 이가 있다는 의미이다. 선림(禪林)에서 다섯 사람까지는 차를 마신다고 표현하였다. 그 이상은 ‘그저 베푼다’라고 하였다. 역시 차는 혼자서 마시는 경우 신묘함에 이르는 경지로 선승들에게 필수적이었다.

  황산곡(黃山谷, 1045~1105)은 혼자서 차를 즐기는 것은 신(神)을 얻고, 둘이서는 멋을 알고, 셋은 맛을, 예닐곱은 그저 나눌 뿐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혼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속세를 떠나고자하는 사람의 마음과 비유되었다. 차는 청빈과 덕을 닦는 사람에게 적합한 것으로 칭송된 것이다. 차의 이러한 맛을 지금은 느낄 수 없어도 차는 자신만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을 가진 듯하다. 차를 마시며 ‘다음 일’이 아닌 지금을 알아차리는 여유를 느껴보자.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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