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독립운동가 유적을 찾아서
김제 독립운동가 유적을 찾아서
  • 정군수 시인 · 석정문학관 관장
  • 승인 2020.08.0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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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 2 (7)김제

김제지역 독립유공자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오월의 숲이 어제 내린 비로 싱그럽게 씻겨 내렸지만 비를 품은 구름은 아직 모악산 자락에 걸쳐있다. 오늘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자유는 피를 먹고 산다는 투쟁의 역사를 생각하니 오늘 독립운동가 유적 답사도 이와 인연이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모악산 금산사로 들어서는 길에 ‘애국지사 정화암 선생 사적비’가 있다.

정화암 선생 생가

■항일투쟁의 혼을 불사른 혁명전사 정화암

정화암 선생님은 전북 김제시 장화리 출신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미국의회의 사절단이 내한 하였을 당시, 일본 침략상과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북경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신채호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국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여 폭탄제조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 방안을 강구하였다. 정화암 선생님은 광복이 될 때까지 투쟁의 의지로 무장되어 있었고 죽음과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삶이 우리의 조국광복을 앞당겼을 것이다. 사적비 앞으로는 모악산 차디찬 물이 그 분의 마음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산면 원평장터로 가는 길에는 막 고개를 내민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원평천이 흐르는 야트막한 산언덕에는 아카시아 꽃과 찔레꽃이 피어있었다. 돌보는 이 없어도 하얀 꽃을 피우는 찔레꽃과 아카시아꽃은 흙과 함께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 같았다. 자갈밭 황토밭에 뿌리를 내리고 가시를 키우며 살아가는 나무, 독립운동가 유적지를 찾아가는 나의 눈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독립운동 열사의 몸에서 자라난 광복에 대한 매서운 의지 같았다. 이때가 바로 옛날의 보릿고개였다.

 

 괭이로 찍어내고 낫으로 베어내도

 자갈밭 산언덕에 찔레꽃 아카시아꽃

 겨레의 하얀 옷 입고 보릿고개 넘긴다

 

 민족의 지도자여 거룩한 영웅이여

 칼날에 살 찢기고 총알에 넘어져도

 매서운 가시꽃 피워 조국산하 지킨다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 장군 추모비 및 학수제

■광복군지대장 이종희장군 과 원평의 3.1운동

원평장터에서는 이종희 장군의 의연한 모습과 기미독립 만세의 함성이 살아나오는 듯했다. 원평에는 기미독립만세를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아홉 분의 애국지사와 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한 이종희 장군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학수재가 있다. 나는 위령각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이종희 장군 생가’와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찾아 나섰다.

이종희 장군은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잔인한 핍박과 폭압을 목격하고 항일 독립을 위한 결연한 각오로 만주로 망명하여 ‘조선의열단’에 가입한 후 항일투쟁에 전념하였다.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군 육군대장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였으며, 그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민족혁명단’에 입당하여 일제 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전라도 대표 및 의원을 역임하면서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다. 해방이 된 후 귀국길에 오르던 중 고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배안에서 발병하여 56세를 일기로 고혼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분의 유해는 구미마을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국립묘지로 이양하였다.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이종희 장군 생가’ 바로 옆에 있었다. 기미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기미독립선언서가 김제에 전달되자 원평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1919년 3월 20일 원평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시장의 군중들에게 몰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전달하였다. 그날 수백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장대에 큰 태극기를 매달아 휘두르며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돌았다. 모내기를 하던 사람들도 밭을 매던 사람들도 흙 묻은 발로 엉겅퀴 쑥부쟁이 길을 달려 왔으리라. 원평 장터 유목정에서 이들은 다시 모여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기념비가 서있는 유목정에는 거목 왕버들이 그날을 기억하듯 원평장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운 선생 순의비

# 성산위에 피어난 충절의 상징

다음날 김제 ‘이상운 학생 순의비’를 찾아나섰다. 김제 봉남면 넓은 들녘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을 지나자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지는 황산면이 나온다. 여기에도 산언덕에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있었다.

이상운 의사는 1927년 이리농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의사는 육당 최남선의 「고사통」을 정독하면서부터 역사의식이 투철한 애국 학생으로 성장하게 된다. 항상 말하기를 “감자는 제 몸을 썩혀 새싹을 키운다. 비장한 거사를 일으켜 나라를 구함에 우리는 조국을 소생시키는 어미 감자가 되자” 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1943년 5월 17일 밤에 금구면에 있는 일인이 경영하는 고깔봉 광산과 금구면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와 차량을 마련하고 김제경찰서를 습격한 다음 목천포 철교를 파괴하려는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잠복하고 있던 일경의 삼엄한 비상망을 뚫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동지를 규합하여 거사를 도모하던 차에 1945년 7월 17일 검거되어 심한 고문과 매질로 광복을 한 달 앞두고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그 때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매 맞아 아프지 않은 이 어디 있으리

 목숨이 두렵지 않은 이 어디 있으리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지만

 의로운 피는 겁 없는 소년을 만들었다

 그 소년이 돌비가 되어 여기 서있다

 피지 못하고 떨어진 꽃봉오리

 선혈로 산화한 꽃넋은 살아 있다

 질곡의 역사 후손에게 알려주려고

 돌비 속에 당신의 피가 흘러

 우리의 세월 앞에 서있다

 어미 감자 썩어 새 감자 키워내는

 너무 슬퍼 눈부신 열여덟의 꽃

 돌비에 손 얹으니 바람이 머문다

 

 정군수 시인 석정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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