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지연 시인
  • 승인 2020.08.0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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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21>

 기린봉 꼭대기 집에는 버드나무가 있다. 주인집 아저씨는 아랫동네에서 주워온 고물을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병은 병끼리 양은그릇은 양은그릇끼리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끼리 정리했으나 바람이 불면 마당에 뒤섞이는 것은 순간이다. 버드나무는 취객처럼 휘청거리고 아저씨는 자기 머리를 치면서 바람을 애써 지우고 있다.

  몇 달째 월세를 내지 못한 나는 살무사가 되어서 작은 쪽문을 흘낏거린다.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폐지 사이에 던져진 내 신발 냄새를 킁킁거리다가 별 볼 일 없다는 듯 지나간다. 일기장에 무릎을 오므린 아이가 자신을 으깨며 풍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누렇고 딱딱하게 하루의 몸이 굳어간다.

  바람이 대문을 밀고 들어온다. 택배 하나가 놓여있다. 얼마 만에 보는 이름인지 까마득하다. 보낸 이름도 받는 이름도 불러본 지 오래여서 손가락으로 이름을 쓰다듬어 본다. 택배 상자 안에는 녹음테이프 하나가 들어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갓 지은 쌀밥처럼 단정하고 따뜻한 글씨체다. 친구 정이가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앞뒤로 녹음해서 보내온 것이다. 서울 고시원에 들어가서 소식 끊긴 정이가 보내온 쌀밥 같은 노래가 카세트에서 흘러나온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눈물이 난다. 주소가 불분명한 정이가 나를 생각하며 보내온 노래라니...... 테이프를 온종일 돌린다. 창을 연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로 집들. 길을 따라 흘러가는 가로수들. 하나같이 창을 열고 있다.

  저곳에도 그리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겠다. 따뜻한 바람이 창 하나를 흔들기도 하겠다. 나는 아저씨가 주무시기를 기다려 길을 따라 걸었다. 담이 허물어진 빈집에 개망초가 희뿌윰하다. 살겠다고 나온 것을 죄지으며 뽑는다던 할머니를 닮았다. 마루 틈에서 안방에서 손을 흔든다. 저승길은 안녕하시냐고 나도 눈인사를 한다. 아랫집에 사는 일용직 사내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간다. 장판을 켜고 죽었다던 김 씨 집은 아직 비어있다. 헐렁하게 모퉁이를 걸어가는데 담 너머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병원에 갔던 이 씨 아주머니는 깁스를 하고 기웃거린다. 시끄럽고 고단한 바람이 각자의 집 어깨를 흔든다. 바람은 바람끼리 통하고 공유하며 흘러간다. 각자의 창 안에서 밥을 지어 먹고 외따로 산다고 생각하는 동안 도라지꽃이 피고 지고 있다. 하얀색과 보라색이 다른 듯 친밀하게 어우러져 있다. 오늘 웃지 않으면 내일은 불안하겠다. 불안한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터트린다. 가자. 세상의 바람을 쐬러. 교차로를 들고 밑줄을 그으며 집으로 향한다.

  옷가게를 지나가는데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노래가 익숙하게 흘러나온다. 기린봉 집을 떠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그저 골목 하나를 돌아서 걸어 나온 것 같은데 이십 년이라니. 정이는 제주도 어디에서 혼자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으로 가고 싶지만 집이 보이지 않을 때가 정이에게도 있을까. 세상에 버려진 고물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까. 누군가의 삶을 답습하며 살고 싶지 않았는데 재활용되지도 않는다고 느끼는 날이 나에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린봉 꼭대기 집에서 온종일 듣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을 부른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본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잘 있느냐고 묻고 싶지 않다. 골목의 바람은 사납거나 아득하거나 따뜻하게 불어올 것이므로. 누구에게나 창은 열려있고 이 바람과 저 바람은 묵묵히 교차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에 우리는 수평선으로 서 있다.

 

 글 = 지연 시인

 ◆지연

 1971년 전북 임실 출생. 2013년 『시산맥』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16년 무등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건너와 빈칸으로』(실천문학, 2018). 2020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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