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 (6)정읍- 의로운 선비가 사는 고장
<기획>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 (6)정읍- 의로운 선비가 사는 고장
  • 김현조 시인
  • 승인 2020.07.3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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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선생 창의 기념표석

실국시대에 책임을 지고 항거하였던 선비와 그 이전의 정읍과 전북을 빛냈던 위인들의 흔적을 찾아 정읍의 동부지역으로 특별한 여행을 떠난다.

정읍은 고부군에서 정읍군으로 변경되면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고부군에 정읍현과 태인현으로 되어 있던 것을 조선말엽 동학농민혁명이 고부에서 일어난 것을 계기로 또다시 고부의 세력이 커질 것이 두려워 고부군을 부안과 고창에 쪼개주고 축소시켰고 계획적으로 정읍을 키웠다. 그렇다고 정읍사람 고부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기 충만한 땅이 지금의 정읍이다. 호남평야의 시작점이기도 한 태인은 과거부터 선비가 살만한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다.
 

■호남최초의 의병을 창의한 현장 무성서원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전라북도의 유일한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남아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써 호남 유림을 키우던 학당이자 나라를 위해 뜻을 모으는 곳으로 활약했다. 신라 후기 학자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 때 관리 신잠을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1906년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다.

무성서원 입구에 ‘태산선비문화관’이 있다. 태인 지역에 유교문화 씨앗이 된 최치원과 정극인을 주목한다. 태인 선비 문화는 최치원의 시가에서 싹튼 풍류와 낭만이 조선시대 최초 가사인 ‘상춘곡’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는 병오년에 최익현 등의 창의를 기록한 비 ‘병오창의기적비’도 있으며, 불우헌 정극인의 동상과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필양사는 무성서원과 지척에 있는데, 한말 유학자인 김영상선생을 배향한 사당이다. 김영상선생은 선비다운 기상을 일제에 보인 애국지사로 일제가 준 은사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군산 감옥으로 이송 당하게 된다. 선생은 만경강을 건너 갈 때, 스스로 만경강에 투신했으나 일본 경찰들이 구조하여 기어이 군산 감옥에 가둔다. 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고 군산 감옥에 투옥 된 후부터 단식투쟁 하여 9일 만에 순국하신다. 1945년 1월 1일 정읍의 지방 유림들이 선생을 기리며 이곳에 사당을 짓고 모셨다.

 

 ■정극인의 묘소와 선비의 흔적

성황산 아래로 필양사와 무성서원을 비롯한 기념물들이 운집하여 있다. 멀지 않은 곳으로 동진강이 흘러가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양택, 즉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성서원에서 2킬로 남짓 거리에 불우헌묘소가 있고 주변에 상두제를 비롯하여 도강김씨, 광산김씨, 권씨, 정(鄭)씨, 송씨, 정(丁)씨 등의 제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두 눈이 번뜩이던 선비들의 혼이 깃든 곳이다.

  또한 필양사 왼쪽 옆으로는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세월을 보냈던 송정을 비롯하여 한정, 영성정, 소정, 영당, 시산사, 송산사 등이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걸으면 상춘곡을 1부터 10번까지 번호를 붙여 새운 멋진 푯말을 모두 볼 수 있다. 거기서 잠깐 숨을 고르며 선비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유물을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

오월과 유월은 괜히 빚진 느낌이 든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우리민족의 여름은 매우 뜨거웠고, 그만큼 상흔이 많이 남아있다. ‘유물을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라는 말을 기억하며 구한말의 호남 대표 의병장 임병찬 선생의 창의 기념표석을 보러 산내면 종성리로 옮기려니 가만 가만히 가슴께가 아파온다.

  옥정호를 끼고 달리는 풍경은 그야말로 선경이다. ‘김개남체포지’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아름다운 찻집으로 변해있다. 눈이 빛나고 성정이 적극적인 김개남은 동학군이 수세에 몰리자 관군을 피해 친구인 임병찬의 집에 숨었다. 아뿔싸 임병찬은 친구지만 동학에 대해서 반군이라고 생각하였던 수구의 선비,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김개남은 양반인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히게 되는데 그것도 똥을 싸다가 체포되었다. 김개남은 똥을 싸며 외쳤다. “이놈들아 똥이나 다 싸거든 나를 잡아가거라.”

  이때도 이념간의 차이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구나. 이념이 친구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라니!

 
 ■선비의 표상 임병찬 의병장

목적지인 ‘임병찬선생창의기념표석’에 도착했다. 관솔불이나 횃불 밝히고 천지신명께 맹서했을 무리들을 생각해 냈다. 개인의 존엄을 세우고자 한 일이 아니라서 후인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역정 내지 않을 그분들에게 목례 드리고 묵념을 했다.

  임병찬 선생은 옥구출생으로 태인으로 옮겨와 살았으며 최익현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을 선고받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했다. 1912년 9월 고종황제로부터 밀조(密詔)를 받아 독립의군부 전남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차후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켰고 총사령이 되었다. 총사령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이후 의병활동을 하다가 결국 1914년 5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거문도로 유배되어 1916년 병사하였다. 선생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눈부신 햇빛인가 하면 자욱한 안개이고 하얀 백합인가 하면 벌레 먹은 사과 같은 선비! 그런 선비들의 나라인 조선, 조선의 힘줄이 뻗어 한반도를 번영시킨 몇몇의 기개 높은 선비, 그들에 경배한다.
 

병오창의 기적비

 <별도 박스>  # 서보단기념탑과 사적기

내장사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에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호남의 유림들이 분연히 일어나 ‘서보단’을 쌓고 복수를 맹세한 당시의 현장인 기념탑이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규탄하는 항일집회인 호남유림대회가 내장사 경내에서 열렸던 까닭이다. 각 고을을 대표하는 유림 54명은 내장산 벽련암에 모여 단을 쌓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복수를 맹세하였으며 해마다 추모제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그때 쌓은 단을 서보단 또는 영모단이라 한다. 기념탑에는 당시 호남유림대회에 참가한 대표 선비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패망과 실국으로 멸시와 좌절감, 지조와 자존심으로 책무를 다하지 못한 선비 혹은 기득권세력의 뒤늦은 후회와 고뇌, 그럼에도 그들을 추종하고 혹은 분위기에 이끌려 뒤따랐던 민중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기념비에서 읽어본다. 사회적 책임은 120여년의 시차를 두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장산 9봉인 월영봉에 걸칠 달에 한 모금!, 우화정에 비칠 달에 한 모금!, 서보단을 쌓고 맹세한 선비의 의기에 한 모금! 진짜 술보다 멋을 부려볼 만하지 않는가.

 

김현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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