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넘어 일흔 앞둔 PNB 풍년제과, 단순한 빵을 넘어 추억까지 담아주고 싶어
환갑을 넘어 일흔 앞둔 PNB 풍년제과, 단순한 빵을 넘어 추억까지 담아주고 싶어
  • 김기주 기자
  • 승인 2020.07.27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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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 관광도시 전주를 대표하는 빵집은 어디일까? 60년 넘게 한결같은 맛을 이어온 전병과 다소 투박하지만, 단맛이 일품인 초코파이 등 맛있는 빵집의 원조격인 풍년제과(PNB)를 꼽는데 이견을 두는 전주 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SNS 등의 발달로 풍년제과(PNB)에서 만든 초코파이가 전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풍년제과는 전주를 방문한 관광객이 필수로 들려야 하는 빵집이자 관광명소가 됐다.

 하지만 풍년제과(PNB)가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0년대 초 풍년제과가 ‘망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무리한 투자를 해서 어려워졌다느니, 원산지가 다른 곳이라느니. 풍년제과에 대한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 1990년대 초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전북지역에서만 30여 개가 넘는 ‘풍년제과’ 분점이 생겨나 그 위상이 올라갔지만 이 중 일부 매장에서는 기존의 빵 맛을 지키지 못해 시민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풍년제과(PNB) 본점은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별다른 해명과 수습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외지 업체가 풍년제과 상호를 인수한 사실도, 빵집을 늘리는 것도 본점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도.

 본점은 자리를 지키며 본연의 맛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3대가 이어온 맛을 지키다 보면 언젠가 다시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과거를 지나 풍년제과(NB)는 다시 부활의 날갯짓을 펼쳤다. 수작업을 통해 만든 풍년제과 표 초코파이가 전국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부터다. 이후 풍년제과 초코파이를 맛보기 위한 관광객들의 행렬이 줄에 줄을 이었고 전국 유명백화점들로부터 잇따라 러블콜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풍년제과(PNB) 앞 진풍경은 10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전북도민일보는 ‘풍년제과(PNB)’를 60년 넘게 지켜온 강현희(71)씨를 만나 그가 가진 빵에 대한 철학과 68년간 전주시민과 함께했던 풍년제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3대째 한결같은 맛을 이어온 풍년제과(PNB) 

 풍년제과(PNB)가 전주 대표 빵집으로 우뚝 서게 만든 장본인은 고(故) 강정문씨다. 이어 고인이 된 그의 뒤를 잇는 사람이 바로 강씨의 아들인 강현희 대표다. 이어 현희씨의 장남인 철웅씨가 본점 운영을, 둘째인 지웅씨가 사세 확장을 맡는 등 3대를 이어가고 있다.

 현 PNB풍년제과 창업주인 강정문 씨는 일본 강점기 ‘도꼬쎈베’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자신이 직접 만든 빵으로 대중들에게 기쁨을 나눠주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주변의 멸시와 괄시를 버텼다. 해방을 맞이하자 정문씨는 쌈짓돈을 모아 지난 1951년 전주시 중앙동 3가 29번지에 현 풍년제과(PNB)의 전신인 ‘풍년 센베 과자점’을 열었다. 풍년제과(PNB)의 시작이었다.

 이후 강정문씨는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는 철학을 과자와 빵에 그대로 녹여냈다. 돈을 벌기 위해 재료를 아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집을 지켰다. 이후 입소문을 타고 그가 만든 과자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메뉴도 다양해졌다. 소보루방, 크림빵 등 풍년제과(PNB)에서 만든 빵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1980~90년대 풍년제과(PNB)는 유행에 민감한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미팅 장소로 사랑받기도 했다. 이천년대 들어선 전주 초코파이의 원산지로 알려지면서 3대째 이어진 풍년제과(PNB)의 69년 전통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 부침도 가득했던 빵집 

 탄탄대로만 걸을 것 같았던 풍년제과(PNB)도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풍년제과(PNB)에도 암운이 드리운 것이다. 2000년 이후 자금력으로 무장한 프렌차이즈 빵집이 생겨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동네마다 빵집이 생겨나면서 시내까지 빵을 사러오는 발걸음은 줄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표권 분쟁도 발생했다. 지난 1980년대 강현희씨 매형 김씨가 지난 1980년대에 풍년제과 상표권 등록을 자기의 이름으로 특허청에 낸 것이 화근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 김씨가 무리하게 내준 체인점이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빵 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체인점마다 빵 맛이 다르다는 혹평을 들으면서 풍년제과는 대중들에게 외면 받았고 김씨는 이때 외지업체에게 ‘풍년제과’ 상표권을 팔아버렸다. 이후 상표권을 사들인 외지업체는 ‘풍년제과’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말라며 소송을 걸었다.

 당시 강현희씨는 외지업체에서 ‘풍년제과’라는 상표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크게 힘들어했다. 당시 빵집 문을 닫을까 고민도 했었다. 다행히 소송 끝에 본점에 한해 ‘피엔비(PNB) 풍년제과’라는 명칭을 쓸 수 있게 됐고 반세기가 넘은 빵집의 이름은 그렇게 바뀌게 됐다.

 △ 풍년제과(PNB)의 구세주 ‘초코파이’

 새로운 이름을 달고 출발했지만, 시작은 어려웠다. 프렌차이즈가 시장을 잠식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매출이 줄었고 적자를 면치 못했다. 직원도 10명 안팎으로 줄일 정도였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했던가. 전주를 놀러 온 관광객들이 풍년제과(PNB) ‘초코파이’에 사로잡히면서 부활을 날갯짓을 시작한 것이다. 관광객들은 기존 초콜릿 빵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맛에 하나 둘 매료됐다. 이후 SNS에 통해 풍년제과(PNB) 초코파이는 전국으로 알려지게 됐고 이에 전주의 새로운 ‘특산품’으로 등극했다.

 두꺼운 초콜릿 코팅 안에 달콤한 딸기쨈과 생크림의 조화는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고 이내 풍년제과(PNB) 초코파이는 전주를 넘어 전국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후 초코파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타 빵집들도 비슷한 초코파이를 내놨지만 풍년제과(PNB) 본점의 맛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이후 언론에서도 풍년제과(PNB) 초코파이만를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인기몰이를 하면서 풍년제과(PNB)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다.

 △ 풍년제과(PNB)는 현재 진행형

 현재 PNB 풍년제과는 강현희씨의 아들인 철웅 씨와 지웅 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본점은 장남인 철웅 씨가, 풍년제과(PNB) 사세 확장은 차남인 지웅 씨가 맡았다. 최근에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서울 유명 백화점 4곳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현재도 다른 유명 백화점 등에서도 풍년제과(PNB) 입점을 손짓하고 있는 중이다. 강씨는 이 모든 게 철웅과 지웅씨, 두 아들의 출중한 수완 덕이라고 공을 돌렸다.

 더불어 풍년제과(PNB) 그동안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새로운 제품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풍년제과(PNB) = 초코파이’라는 인식이 너무 큰 탓에 부담도 적지 않지만 강 씨는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빵을 만들겠다고 자신했다.

 강현희씨는 “70년 가까이 가족과 함께한 빵집을 기억해주는 손님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면서 “그동안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풍년제과(PNB)를 기억해주신 손님들의 위해서라도 더 맛있는 빵과 건강한 과자를 만들어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 풍년제과(PNB)를 쓴 이유

 현희씨는 인터뷰 내내 풍년제과 ‘PNB’를 강조했다. 풍년제과가 아닌 풍년제과(PNB)에 강조한 이유는 아버지인 고 강정문씨가 일제 치하에서 어렵게 기술을 배운 뒤 만든 빵집은 경원동 ‘풍년제과(PNB)’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다시금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전주 시민과 함께한 풍년제과(PNB)가 3대를 넘어 전주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길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김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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