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연대
애도와 연대
  • 이윤애
  • 승인 2020.07.19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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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타까움과 충격을 넘어 마음 한구석 너무 불편했고 고통스러웠다. 아마 오랫동안 그분의 가치지향을, 인권과 시민운동의 궤적을, 펼쳐온 정책들을 함께 했고 신뢰했던 많은 사람도 동일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남겨진 우리에게 커다란 숙제를 안겨주었다.

 그날 처음 ‘박원순 서울시장 실종’이라는 속보기사를 접하고서도 헤드라인만 보고 서울시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쯤으로 오독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각종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난무하면서 혼돈스러운 시간이었다. 밤새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봤으나 사망이라는 비보로 망연자실했었다. 다음날 이어지는 성추행 피소사실에 대한 뉴스는 충격이었다.

 평소 인권이 필요한 곳에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목소리를 내줬고 특히 여성부문을 앞장서서 실현했으며 젠더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서울시 성평등정책은 단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인권·시민 운동사에 큰 궤적을 남긴 그분을 보내는 마음은 무겁지만 차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도만 할 수 없었다. 내 주변사람들에게는 안타깝고 애달프나 드러내놓고 그분의 지난 삶을 칭송하거나 애도할 수 없음을 조심스레 밝혔다.

 시민사회진영은 갈라졌다. 박원순 시장이 살아온 발자취를 평가하며 추모가 먼저라는 목소리와 피해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며 연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팽팽하다. 격렬한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마치 전투장을 방불케 한다. 추모하는 맘을 가해로 규정하고 피해자와 연대하면 무례로 낙인찍는 단순논리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백해무익할 뿐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사회적 갈등만 부추기는 공격을 멈추고 오늘의 상황이 문제해결의 접점으로서 출발하길 바란다.

 피해자들 곁에 있을 때 더욱 빛났던 인권변호사로서 그분의 정신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일이 ‘그럴 리가 없다’며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그분은 피해자를 모독하며 공격하진 않았을 거라는 믿음도 굳건하다.

 더구나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는 일과 피해자에게 연대의 마음을 갖는 일은 극단에 있지 않았으며 단언컨대 애도와 연대는 함께할 수 있다고 본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런 사태가 발생하기까지의 구조적 문제를 살피는 일이 오랫동안 인권과 성평등을 옹호해 온 그분의 뜻과 맞닿는 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권력 앞에서 고통받는 약자를 위해 나섰던 그분이 우리 사회에 평생을 던져 깨우치고자 했던 가치를 좀 더 적극적으로 톺아본다. 그분의 삶을 교훈 삼아 다시 발전적으로 전진하는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라고 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오늘 그분의 부재를 애도하며 동시에 피해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까닭일 것이다. 서로 존중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어야 성숙한 사회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다.

 그동안 다양한 영역에서의 미투 이후 한국사회는 젠더문제가 중심이슈로 이동되는 듯했으나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음을 이번 국면을 겪으면서 새삼 확인한다. 공직사회를 중심으로 미투에 대한 대응메뉴얼을 촘촘하게 갖추고는 있으나 잘 작동되지 않았거나 성평등한 조직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을 거라는 의심도 든다.

 이번 사태로 젠더이슈가 묻히거나 여성부문이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문제해결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정쟁으로 접근하거나 아무 말 대잔치도 경계해야 한다. 건강한 목소리들이 품격을 갖추고 핵심을 직시하면서 문제해결에 집중되길 소망한다.

 이제 젠더민주주의를 필수 덕목으로 받아들이자.

 이윤애<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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