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라는 업(業)과 책임윤리
정치라는 업(業)과 책임윤리
  • 채수찬
  • 승인 2020.07.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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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박원순 시장의 상가에 가서 조문하고 왔다. 지인들이 모인 추도식 말미에 박시장의 딸은 울먹이며 “아빠에게 왜 이루어지지도 않는 변화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고 물었다면서 “여러분들이 변화를 이루어 달라”고 말했다. 우울한 기분에 다시 전주에 내려와 후배들과 조용히 술잔을 나누었다.

 사람이 스스로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우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에 연루되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에는 착잡한 심정이 된다. 극단적 선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격함이 작동했다는 면에서 보면,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일정한 상황에서 잘못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선택은 자기 오만을 드러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박시장의 선택에 또 한 가지 측면이 있다. 그가 선출직 공직자, 곧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은 “나는 이 모순을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나머지는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하는 얘기로 들리는데, 이는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 책임지는 태도는 더욱 아니다. 생각이 정치 지도자의 책임의식에 미치자 갑자기 소싯적 읽었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업(業)으로서의 정치」가 생각났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독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해가며 정독했다.

 업으로서의 정치는 1919년 독일이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혁명기에 쓰여진 강연록이다. 좌우의 격돌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편드는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고, 정치라는 업(業)의 본질에 대해 얘기했다. 정치인의 선택에 대해서 「절대적 목적의 윤리」와 「책임윤리」를 대비시키며 정치 지도자는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힌두교 사회에서는 절대적 목적을 지향하는 지배계급과 현실에 책임지는 지배계급이 분리되어 있다. 카톨릭 사회에서 절대적 목적의 윤리를 더 강조한다면 개신교 사회에서는 책임윤리를 더 강조한다고 막스베버는 생각한다. 유교사회에서는 이 둘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지배계급의 덕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정치인의 덕목에 하나의 윤리가 더해졌다. 그것은 사적 영역의 윤리다. 쉽게 말해서 돈과 여자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정치지도자에게 이 덕목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추가적 요구의 결과는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사는 현실세계에서 절대적 목적의 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 균형을 잡고, 거기에 더해 사적 영역에서도 도덕군자인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척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러다가 사고를 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사람을 채용하면서 배우게 된 것은, 세 가지 조건을 꼽으면 거기에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 두 가지만 충족하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에게 훌륭한 철학자의 덕목과, 훌륭한 사업가의 덕목과, 훌륭한 가장의 덕목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면 정치인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을 꼽으라고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가장 중요한 게 책임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상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회를 전진시켜야 하고, 자신은 도덕적이지 못해도 사회를 향상시켜야 한다. 그리고 보면 정치인은 행복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한 사회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사태로 온 세계가 힘들어하고 있다. 위기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정치 지도자를 어느 나라에서든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막스 베버는 1920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채수찬<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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