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무늬
연애의 무늬
  • 문신 시인
  • 승인 2020.07.14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8>

 이선희, 조용필, 김연자, 민해경, 이문세, 서태지와 아이들. 장르를 불문하고 이들의 노래가 내 십 대의 순정하고 명랑한 리듬이었다. 그러나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나는 노래 없는 청춘을 보냈다. 일상은 멜로디 없는 문장처럼 건조했고, 어쩌다 폭발하는 열정 같은 것들도 맥락 없는 소음처럼 고단했다. 돌이켜보면 1992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앨범 <난 알아요>를 끝으로 내 몸과 마음의 리듬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리듬을 잃어버리자 이십 대의 생활은 분별없는 박동으로 소란했다. 저만치 달아나는 꿈과 이상을 좇아가는 삶은 허겁지겁이었다. 그 관성으로 서른 살을 지나고 마흔 살이 되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나는 세상의 리듬 한 가닥을 간신히 움켜잡을 수 있었다.

 리듬의 시작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지금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은 사람을 편애한다. 그의 소설은 러시아 리듬이었다. 밤새 그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눈을 감으면 내 몸 가득 러시아의 장중한 리듬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십 대에 읽었던 그의 소설들이 내 리듬으로 잠복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리듬을 깨운 것은 차이코프스키였다. 마흔을 갓 넘은 어느 날, 나는 직장 동료가 들려 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 넋을 잃었다. 몸서리를 쳤다. 내 몸의 세포들이 바짝 곤두섰다. 핏줄은 바이올린 현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머릿속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러시아 설원이 파노라마를 이루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리듬의 환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삶이 제법 흥미로웠다.

 나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광활한 러시아 영토를 들여다보며 차이코프스키를 들었다. 어느 하루, 나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들었고, 차이코프스키가 그 음악에 ‘신의 섭리’라는 주제를 붙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모스크바 광장을 걸어가는 늙은 군인의 발걸음처럼 장중하게 시작하는 1악장을 특히 좋아한다. 거기에는 퇴역 군인의 사랑과 정렬, 한바탕 격전 끝에 찾아오는 안도, 낡은 훈장을 들여다보는 먼 눈빛 같은 것들이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늙은 군인이 되어 지나간 시간을 쓸쓸하게 더듬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4악장에 이르면 그는 아껴두었던 한 시절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다. 그쯤 되면 나도 꺼내놓을 게 있다.

 민해경.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사랑을 어쩌면 좋아요”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가져왔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1981년에 발매된 민해경의 2집 앨범에 실린 이 노래가 이십 년 넘는 잠복기를 끝내고 발현하던 날, 화창했는지 흐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 보였고, 손끝이 시렸으며, 세계는 침묵하고 있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철없이 눈썹을 치켜뜨고 다녔던 내가 어느덧 “내 인생의 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그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라는 노랫말에 가만히 눈을 감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철 들었다’ 같은 어림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두 노래 모두 내 어쭙잖은 십 대를 기억하는 리듬이니까.

 나는 그 리듬을 기념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과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시 한 편을 얹어놓았다. 「연애의 무늬」라는 시다. 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민해경을 번갈아가며 들었다. 늙은 군인의 희미한 사랑과 어느 소녀의 간절한 사랑을 시로 써내고 싶었다. 마침내 나는 눈 내린 아침에 눈밭을 걸어가는 열댓 살 풋소녀들의 깔깔거림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보았다. 나는 “저런 무늬하고 연애나 해볼까?”라는 문장을 쓰면서 러시아 설원에 서 있는 늙은 군인을 떠올렸고, 아스라한 저편에서 발갛게 언 손을 모아 쥔 소녀를 상상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차이코프스키와 민해경의 거리였다. 내 십 대와 사십 대의 거리이기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나는 또 하나의 거리를 시 안에 간직해두었다. “옛 겨울밤의 뜨거운 무늬”가 그것이다. 가끔 그 시절은 잘 있는지 궁금해질 때면 차이코프스키도 좋고 민해경도 좋다. 볼륨을 높이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온몸으로 따라 부른다. “그대를 그대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니까”

 

 글 = 문신 시인

◆문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물가죽 북』『 곁을 주는 일』이 있으며,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