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문화(王都文化) 되살리자
왕도문화(王都文化) 되살리자
  • 이정희 전주대 평교 미술아카데미 교수/지후아트갤러리 관장
  • 승인 2020.07.1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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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全州)는 후백제 견훤왕의 도읍지다. 또, 조선왕조를 일군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기도 하다. 두 왕조(王祖)의 뿌리가 전주이기에 전주인(全州人)은 곧 왕도인(王都人)인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을 거쳐 현대사회 들어서면서 전주는 수도권과 영남권 집중개발정책에 밀려 정치적으로 소외돼 낙후를 거듭했다.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필자는 왕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왕도문화를 되살리자고 감히 주장한다. 필자의 주장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충분하다.

 전주(全州, 온고을)는 노령산맥의 줄기로 둘러싸여 있다. 기린봉, 승암산, 고덕산, 모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다만, 서북쪽이 열려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이를 비보(裨補)하는 장치들로 보완했다. 덕진제방, 숲정이, 진북사(鎭北寺) 등이 그것이다. ‘건지산(乾止山, ’하늘(임금)을 지탱하는 산‘이란 의미)’이라는 명칭도 그렇다.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기 위해 ‘건지산’이라 한 것이다.

 1541년(중종 20) 전주사람 50여명이 연명으로 올린 소에 의하면, “(전주부의) 지형이 남쪽은 높고, 북쪽은 허하여 바닥기운이 분산하기 때문에 ‘진산’ 이름을 ‘건지산’이라 하고, 제방을 쌓아 이름을 ‘덕진(德津)’이라 하였으며, 절을 창건하여 ‘건흥사(建興寺)’라 하고, 서쪽에 있는 조그만 산을 ‘가련산(可連山)’이라 했습니다”라 한 것은 그런 비보 풍수를 말해준다. 지금의 덕진호수공원은 전주의 완전한 풍수를 위해 축조된 인공호수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의 지리서들에도 진산이 ‘건지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는 ‘기린봉’이 주산이라는 것이다. 기린봉이야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주산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는 데 비해 건지산은 주산으로서 너무 약한데 기린봉에 왕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이 기를 누르기 위해 조선왕조는 일부러 주산을 건지산으로 잡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결국, 전주에 왕기(王氣)가 흐른다는 이야기다. 전주는 일찍이 후백제의 왕도로 자리하였고, 이후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기능했다. 하지만 그만큼 시련도 적지 않았다. 후삼국시대 견훤왕이 900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견훤왕성(전주성)을 축조했다. 그리고 37년간 후백제의 도읍으로 유지해오다 936년 신라에 멸망했다.

 고려시대를 거쳐 태조 이성계(재위 1392 ~1398)는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전주는 지방제도상 중용한 행정거점으로 자리잡아 태조 원년 ‘완산유수부’로 승격하고 전주성을 창건했다. 1403년에는 ‘전주부’로 개칭됐다. 왕궁으로 사용되던 한양성(漢陽城) 다음으로 전주성(全州城)의 위용은 대단했다.

 우리나라 최초 문전성시(門前成市, ‘성문 앞에 장이 섰다’는 뜻)가 서울 남대문시장이 아닌 전주성 남문인 풍남문, 당시 3층으로 건축됐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2층으로 재건됨) 앞에 형성된 시장, 지금의 ‘전주 남부시장’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심이 바로 현재 재건중인 전라감영이다. 전주시는 단순히 옛것 하나를 복원하는데 그쳐선 안 된다. 형태와 규모는 다르지만, 왕궁을 세계적 박물관으로 거듭나게 한 프랑스 르부르박물관과 체코의 프라하성처럼 지금부터라도 전라감영 복원과 함께 유·무형의 왕도문화를 되살리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필자는 전주시 역사문화지에 이른바 ‘왕도스토리(The Kingdom story)’를 재구성해 벨트화하기를 공개적으로 제안한다.

 이정희<전주대 평교 미술아카데미 교수/지후아트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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