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철학
비움의 철학
  • 김동수
  • 승인 2020.07.02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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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는 가늘고 길다. 그런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속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몸이 가늘고 작은 대나무가 큰 나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빠른 성장을 해야만 했다. 궁리 끝에 속을 채우는 내실(內實)을 뒤로 하고 외피 성장을 선택했다. 다른 나무들처럼 속까지 채우려고 했다면 그도 아마 다른 생물들처럼 일찍이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나무는 이미 비움의 미학을 체득하여 오늘날처럼 청정한 사군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선인들은 말한다. 사람들도 대나무처럼 비워야 산다고-. 공자도 논어에서 군자는 ‘배불리 먹기를 바라지 말고, 편안하기만을 취하지 말라(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고 했다. 잘 먹고 몸을 편하게 거처하다 보면 단명해진다는 것이다. 장수 동물들도 그렇고 장수노인들도 한결같이 포식을 하지 않고 속을 비워둔다고 한다.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데 열중하다 보면 병(病)이 된다. ‘암(癌)’자를 보면 ‘먹고(口), 먹고(口), 또 먹어(口) 산(山)처럼 쌓여 병(?)이 된 게 ‘암(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사코 먹고 또 먹어 채우려고만 하다 보니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99마지기 논을 가진 자가 1마지기 논을 채우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경우도 그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한없이 채워나가는 욕망보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지라고 한다. 모래밭에 빠진 자동차가 나아가지 못해 헛돌고 있을 때, 바퀴에서 가득찬 바람을 조금 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 오히려 줄이고 비움으로써 전진할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내재하여 있음을 배우게 된다. 노자는 그것을 ‘빔’ 곧 ‘허(虛)의 세계’라 불렀는데, 이는 공자가 말한 ‘선비의 궁(窮)’과도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멀리 이동한 새들도. 작고 가벼워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북극제비갈매기들이다. 이들의 몸길이는 30cm, 체중은 120g밖에 안되는데 이 작은 새들이 매년 8월이면 북극 그린랜드에서 남극해로 출발하여 이듬해 5월 그린랜드로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도중에 낙오된 새들도 있는데, 끝까지 목적지에 도착한 새들의 비결은 남들보다 앞서가려는 경쟁심을 버리고 바람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다. 남보다 빨리 가려는 조급함에 직선으로 가려하지 않고, 돌고 돌아서 가는 s자 코스를 선택한다고 한다.

 버리고 비우는 데 익숙한 새들이다. 그래서인지 석가모니도 ‘비움이 크면 얻음도 크다’하였고 노자도 『도덕경』에서 ‘도(道)는 텅 빈 그릇이라 아무리 퍼내어도 채워지지 않으니’, ‘비워 만족할 줄 아는 자가 부자(知足者富)’라고 하였다. 탐욕과 집착은 불행의 근원이니, 채워가는 소유보다 때로는 멈추고 버려 자유로워지라는 가르침이다. 비우고 나누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부족해 보이던 것들이 오히려 넉넉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백을 살려 보다 큰 우주의 기운을 담고자 한 동양화도 그 중의 하나다. 부족해서 비워두는 아쉬움의 공간이 아니라, 비움은 유(有)를 만들어 쓰임이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버팀목 역할을 하는 생성(生成)의 공간이다. 돌덩이를 깎아 절구통을 만들 때, 깎여져 나간 무수한 잡석(雜石)로 인해 하나의 절구통이 만들어짐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깎여져 나간 공간 때문에 하나의 절구통이 되었기에, 비움과 ‘무(無)’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결코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정보와 물량의 홍수 속에 방치되어 보이지 않는 것 속에 가려져 있는 비움의 세계를 잊고 있다. 비움은 함이 없는 무위(無爲)이면서도, 하지 못함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태허(太虛)다. 그러기에 동양철학에서의 공(空)과 무(無)는 결코 그저 비어 있는 무용(無用)의 빈터가 아니다. 세상 만물이 있음에서 생겨나고(天下萬物生於有), 있음 또한 없음에서 생겨나니(有生於無), 비움과 무는 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무(無)가 곧 유(有)로 전환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법계(法界)가 아닌가 한다.

 김동수<시인/전라정신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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