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 역지사지(易地思之)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 역지사지(易地思之)
  • 송일섭 염우구박네이버블로거
  • 승인 2020.07.02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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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2003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 해병대가 한 마을에 우물을 팠습니다. 멀리에 있는 강가에까지 한참 동안 걸어가서 물을 길어오는 마을 아낙네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우물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메꿔지고 맙니다. 미국의 해병들은 무장 단체인 탈레반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바싹 긴장을 한 가운데 다시 우물을 복구합니다. 그러나 우물은 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마을 아낙네들이 미국의 종군기자 킴 베이커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우물은 우리가 메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종군기자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먼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마을 아낙네들을 안타깝게 여겨 만들어 준 우물을 그 수혜 당사자들이 부숴 버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녀들은 우물을 메꿨을까요?

 먼 곳에 있는 강가에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일은 마을 아낙네들에게는 고된 노역이 아니라 일종의 휴식이고,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아낙네들이 강가에까지 가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답답한 숨통을 여는 시간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공포에 떨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아낙네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서로 안부를 묻고 정보를 공유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을 한복판에다 판 우물은 일종의 ‘원형 감옥(Panopticon)’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물을 길으러 가는 길은 살벌한 전쟁과 폭압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016년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물을 만들어 준 미국 해병대의 선의(善意)는 마을 아낙네들에게는 희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가혹함과 환경의 열악함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마음을 더 주눅 들게 하는 악의(惡意)가 되고 만 것입니다. 얼핏 보면 선의(善意)였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요구와 희망이 배려되지 않은 헛된 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선의(善意)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보는 일은, 이 예화에서 보듯 비록 선의(善意)라 해도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애꾸눈에 외다리며 난쟁이인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화가를 불러들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합니다. 화가는 왕이 자신의 불편한 모습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라며 온전한 두 다리에 두 눈을 똑바로 뜬 보통 키의 초상화를 그려줍니다. 그러나 자신과는 엉뚱하게 다른 모습을 본 왕은 자신을 능욕했다고 생각하며 분노합니다. 그 뒤에 불려 온 화가도 그 소문을 들은지라 사실 그대로의 왕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번에도 왕은 자신의 흉한 모습에 모욕감을 느끼고 화가를 쫓아버립니다. 세 번째 화가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왕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다리 하나는 말의 반대편에 가려져 있었기에 보이지 않았고, 목표물을 겨누고 있어서 눈 하나는 감을 수밖에 없었으며, 허리를 숙인 채 말을 타고 있어서 난쟁이인 그가 정상인처럼 보였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 화가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도 ‘상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했습니다. 상대의 입장과 처지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송일섭(염우구박네이버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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