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공승열 옹 “내 몸속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6·25 참전용사 공승열 옹 “내 몸속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 김기주 기자
  • 승인 2020.06.2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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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승열 6.25 참전용사가 24일 익산시 송학동 자택에서 97년도에 받은 6.25 참전용사증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표 기자
공승열 6.25 참전용사가 24일 익산시 송학동 자택에서 97년도에 받은 6.25 참전용사증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표 기자

 “눈앞에 있던 전우가 지뢰를 밟아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지, 그때 날아온 지뢰 파편이 지금도 내 허벅지에 박혀 있네...”

 6·25 참전용사 공승열옹(85)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2년 5월 5일 만 16살의 나이로 참전한 공 옹은 이듬해(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다.

 1936년 전북 김제에서 3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난 공 옹은 고등국민학교(현 중학교)를 다니던 당시 학교 교련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군에 입대하게 됐다.

 입대 후 공 옹은 미군 25사단 27연대 3대대 소속으로 강원도 양구 등 38선 전방에서 북한군과 맞서 싸웠다.

 공 옹은 “당시는 우리 사단은 북한군과 대치해가며 매일 밤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다”며 “낮에는 별다른 미동을 보이지 않던 북한군은 밤만 되면 기회를 엿보고 기습 작전 등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총성이 가득했던 그 당시 전쟁터의 처참했던 광경들은 아직까지 공 옹에게 큰 괴로움으로 남겨져 있다.

 공 옹은 “전우들과 함께 야간 정찰을 하던 중 북한군의 기습으로 12명이 모두 포위된 적이 있었다”며 “북한군이 칼로 전우를 찌르는 데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전우들과 사력을 다해 탈출을 감행했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탈출하는 전우들을 향해 북한군이 총을 난사했고 머리 뒤로 총알이 스쳐 지나가던 그때의 공포감은 지금 뿐만 아니라 죽을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 같다”면서 “부대로 돌아오니 정찰에 나갔던 전우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2명 뿐이었다”고 말했다.

 공 옹은 68년 넘게 자신의 허벅지에 지뢰 파편이 박힌 사연도 언급했다.

 공 옹은 “북한군과 교전을 하던 중 바로 앞에 있던 전우가 지뢰를 밟아 그대로 즉사했는데 지뢰 파편이 내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 부분에 그대로 박혔다”면서 “당시는 경황이 없어 응급치료만 받고 다시 전장에 나갔는데 제대 후 검사를 받아보니 지뢰 파편이 그대로 박혀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이후에도 병원에 가봤지만, 파편이 신경과 가까이 맞닿아 있어 잘못될 경우 한쪽 다리가 마비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지금까지 지뢰 파편을 몸속에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6·25 전쟁 70주년 소감을 묻자 공 옹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참혹함의 나날이었다”면서 “군대에 같이 입대했던 동기 7명 중 살아남은 사람도 나 혼자였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공 옹은 최근 경직된 남·북 관계에 대해서도 “대화를 단절하고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댈 경우 돌아오는 것은 피비린내나는 참극 뿐이다”면서 “두번 다시 6·25전쟁과 같은 ‘동족 상잔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로가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구축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김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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