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끝에 놓아두고 올 것들의 목록을 생각하다
바다 끝에 놓아두고 올 것들의 목록을 생각하다
  • 김정경 시인
  • 승인 2020.06.23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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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5>

 ‘바다 끝’은 정적인 피아노 소리로 시작된다. 잔잔한 바다 풍경을 그리듯 피아노 음률이 한 음 한 음 짚어내고 그 위에 최백호의 목소리가 실린다. ‘바다 끝’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물결 위를 떠다니는 늦은 오후의 햇살 조각 같다. 이 곡을 처음 들은 날 나는 그가 ‘먼’ 하고 첫음절을 내뱉자마자 그만 마음이 철퍼덕 주저앉았다. 울 준비를 마친 비구름처럼 쉽게 무너졌다. ‘먼 아주 멀리 있는 저 바다 끝보다 까마득한 그곳에’ 하고 한숨 쉬듯 읊조리듯 노래할 때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울음이 터졌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놀라고 당황한 채로 눈물을 줄줄 쏟았다. 내가 흐느끼는 소리를 나만 들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울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가 볼까 봐 불까지 끄고서….

 돌이켜 보면 아닌 밤중에 웬 청승이었을까 싶어 무안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때는 한바탕 물기를 바깥으로 쏟아내고 나자 후련했더랬다. 바다 끝보다 더 까마득한 곳으로 가서 그곳에 ‘태양처럼 뜨겁던 내 사랑을 두고 오자’ 하는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는 태양처럼 뜨겁기는커녕 식은 밥 한 덩이 같은 사랑조차 내게는 없었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물결 같았던 그의 목소리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격정에 휩싸인다. 태양마저도 집어삼키는 바다의 끝에서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하는 가사로 노래는 끝이 난다. 때로 한 곡의 음악이 놀라운 일을 벌이기도 한다. 백 마디 말보다 사려 깊고, 그 어떤 아름다운 문장보다 선명하게 영혼에 자국을 남긴다.

 2017년의 봄에 나는 십 년 넘게 해오던 일을 그만두었다. 어느덧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가 되어 있었고, 애면글면 움켜쥐고 있던 것들은 막상 손을 펴자 흔적조차 없었다. 간신히 그토록 바라던 시인이 되었으나 생활에 밀려 시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 있곤 했다. 끙끙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같은 자리만 맴돈 것 같아서 분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번번이 싸움에서 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바탕 쏟아지는 비를 우산 없이 맞고 집으로 돌아온 날, 늦은 저녁을 먹고 고치 속에 든 누에처럼 이불을 칭칭 감고 누워 하필이면 이 노래를 듣고야 만 것이다.

 너무도 간단히 나를 울린 ‘바다 끝’은 얄궂게도 그해에 발매한 최백호의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불혹>에 수록된 곡이었다. 울 만큼 울고 나자 민망함과 함께 밀려든 생각은 ‘어떻게 하면 40년 동안이나 같은 일은 할 수 있을까?’였다. 오랫동안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이 그 무렵의 나에게는 가장 막막하고 버거운 일로 다가왔으니까. 만약 ‘바다 끝’이 모든 게 다 지나가고 난 뒤의 고즈넉함을 초연하게 노래했다면 그 밤 나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굽이치는 파도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담담하고자 하는 심경이 내 마음에도 비쳐들었기에 초로의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공명하게 되었으리라. 결국 아주 먼 곳까지 가서 놓아두고 오고 싶은 것들은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의 목록과 같으므로.

 한 곡의 노래로 인하여 큰 위안을 얻고는 인생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으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 밤에서 멀어진 2년 뒤, 시집 한 권을 겨우 세상에 내놓은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한 가지 일에 곡진함을 다해 오랜 시간을 바치는 사람에 대한 경외 또한 그대로이다. 이제 불혹을 넘긴 나는 종종 올해로 일흔한 살이 된 그가 무대에서 ‘바다 끝’을 부르는 모습을 찾아보곤 한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나이 듦이 아름다움의 경지가 높고, 넓고, 깊어지는 과정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글 = 김정경 시인

 

 ◆김정경

 2013년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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