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에서 만난 충(忠)과 민(民)
단양에서 만난 충(忠)과 민(民)
  • 임보경
  • 승인 2020.06.22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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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19는 나와 이웃을 그리고 세계를 각자의 골방에 가뒀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우리를 환영해 주는 곳은 없었다. 반기지는 않았지만 떠났던 선행답사! 덥고 답답하고 가는 곳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아 길 나섬의 행보 중 가장 홀대를 받은 여정이었다.

 충북 단양읍을 가기 위해 달렸던 도로 쉼터에 지금껏 쉽게 보지못한 마크가 있었다. 그 이름은 삼족오였다. 남한강의 휴게소에서도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마크가 남쪽 지역과는 색다르게 눈에 띄었다. 뭔지 모를 뭉클함의 울림과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3시간가량 달려와 보니 충북 단양군이다. 청정지역이라 자랑할만큼 청량했다. 태양을 움직인 세발 달린 까마귀는 하늘의 후손이라는 천손국과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세계관을 벗어던진 고구려가 혼자만이 아닌 여러나라와 같이 하며 서로 문화의 발전과 공생하는 관계속에서 고구려의 천하관을 단양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서쪽으로는 제천과 아래쪽에는 문경시가 그리고 동남쪽에는 경북 영주의 풍기가 이웃해 있었고 위로는 강원도 영월이 경계를 이루었다. 조금만 빠른 걸음 뛰면 김삿갓의 묘지가 나올 듯했다. 몇 해 전 다녀간 영월이 반갑게 기웃거리게 하기도 했다. 2020년 1월 새해에 다녀온 태백산, 태백산의 검룡소에서 발원지가 된 남한강은 진안 데미샘이 섬진강의 근원이었고 금강의 발원지인 장수 뜬봉샘이었음을 찾아다니며 느꼈던 감흥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수려하고 드높은 산들은 남한강의 고리에 둘러싸여 온달산성의 위풍당당함이 청록의 산세와 석회암지대로 이루어진 절벽의 풍광을 한층 더 자랑스럽게 하였다.

 온달은 정말 부족한 바보였을까? 고구려 평원왕의 평강공주와 온달의 결합은 고구려 신진세력과의 결탁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온달장군 세트장과 산성을 돌아보았다. 최근 온달장군이라는 적성총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무덤양식을 갖춘 돌무지무덤에서 단양민들에게 구전되어 오던 온달장군의 전설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800여미터의 냉굴이 온달장군 동굴이라는 간판을 내밀고 있다. 한때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피신처였다는 이 동굴은 석회암지대의 특징을 담은 채 종유석의 기이한 형태를 자아낸 지하속의 카르스트지형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러 이야기를 남긴 온달장군은 죽음으로서 남긴 메시지가 있었다. 옛고구려의 염원이었던 계림현에서 죽령일대까지 신라와 맞닿은 경게지역을 무너뜨려야만 했던 그 굳은 마음은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못지않은 고구려의 천하관이었다고 본다. 외모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옷은 남루하며 밥은 빌어먹으며 욕심없이 계산을 할 줄 몰랐다는 그의 역사적 표현(삼국사기)은 6세기에서 7세기를 지나는 고구려시대(안자왕 안원왕 양원왕)의 혼란과 권력다툼을 극복하기 위한 평원왕(평강왕)의 신진세력을 발탁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신분상승된 즉 고구려 후반의 주세력으로 자리잡은 온달장군은 신분상승에 대한 책임감을 충(忠)으로서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던 것이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의 생활불교를 잠깐 엿보며 남한강 일대를 돌아보았다.

 남한강을 끼고 형성된 취락들과 산세가 주는 묘한 분위기는 모래와 강물이 자연 속에 비치는 석문(단양 2경) 안에 흐르는 역사를 다소곳하게 담아냈다.

 잘 익은 잣송이 모양의 만천하스카이워크 전망대는 사과껍질을 깍듯이 돌아 오르니 유리바닥의 난간에서 엉금엉금 살얼음판을 걷듯이 기어오르니 발아래 펼쳐진 단양의 풍광이 남한강의 후덕한 인심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문객과 시인들의 발걸음에 김홍도 등의 화가들이 찾았던 도담 삼봉을 만났다. 길에서 얻은 아이라는 전설을 가진 삼봉 정도전의 동상앞에서 그를 잠깐 새겨보았다. 단양팔경중 이곳이 단양 1경의 시작이란다. 세 개의 봉우리중 중앙이 장군봉으로서 남편봉 그리고 좌우에 애교쟁이 첩봉이 볼록하게 서 있고 반대편에는 질투심 많은 처봉이 뾰로통하게 서 있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남긴 삼봉에서 정도전 또한 민(民)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남한강 상류에 있는 단양에서 만난 인물들은 그 지역의 지리적 현상과 문화적인 공동체속에서 절대 동떨어진 삶을 시작할 수 없었다. 자연을 통해 마음을 수양하고 자신의 올곧은 의지를 세웠다.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솔직하게 실천해 나갔다.

 임보경<역사문화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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