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에 산다] (9) 元岩(원암)수양관...白永奎원장(백영규)
[보람에 산다] (9) 元岩(원암)수양관...白永奎원장(백영규)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7.13 0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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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浪人(부랑인)에 포근한 보름자리
勞動의 신성함과 人生의 가치 일깨워
얼룩진 삶과 아픔을 함께

“얼씨구나 잘이헌다. 품바하고 잘이헌다” 각설이의 왕초가 大鵬(대붕)의 뜻을 펴낸곳! 완주군 소양면 매월리 元岩修養館((원암수양관). 뜻밖에 2층콘크리트 현대식건물이 버티고 있다.

 얼핏보기에 부랑인의 거처라기엔 걸맞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이 원암수양관은 스스로 각설이의 왕초이기를 원하는 院長 白永奎씨(백영규·56)의 사랑과 피땀의 결실이 영근 곳.

 白원장은 지난 1978년 사재를 몽땅 털어 이곳의 임야 15만평을 구입, 비록 엉성하지만 2백평 규모의 숙소를 손수 망치를 들고 지었다는 것.

 다행이 지난 1982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몽매에도 그리던 연건평 750평의 건물을 완성, 현재 전국에서 모여든 105명의 부랑인을 수용하고 있다.

 남녀 어린이에서 노인, 무학에서 15명의 학사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이들 부랑인 가족은 규칙적인 예배와 작업 등 일과에 따라 하루하루를 짜임새있게 엮어가고 있다.

 특히 이들은 경노동이긴하나 규칙적인 노동을 한다.

 크리스찬이기도한 白원장은 성서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노동의 신성함을 놀고 먹기에 길들여진 부랑인들에게 체험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와함께 白원장은 지금껏 주부식비만은 국고보조로 해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自立을 목표로 自活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여러채의 비닐하우스에서 꽃나무를 재배하고 양계와 표고도 재배하고 있다 물론 이들 自活작업장이 부랑인의 작업현장이다.

 “自立自活! 이는 乞人(걸인)을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바꿔놓는 일이죠. 공짜 좋아하면 안됩니다. 국고보조금이나 긁어모으려는 일부 사이비 자선사업가들이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짓고 사회에 상처를 남겼습니까?”라며 白원장은 침통해 한다.

 순간 ’釜山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리면서 白원장의 求道者的(구도자적)인 거룩한 삶이 감동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白원장은 원생의 대부분이 사회적 소외와 가정적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성격적 파탄자라는 점에 관심을 돌려 원생의 복지문제에 깊은 정성을 쏟고 있다.

 自活사업에서 얻어진 수익금으로 一人一通帳(통장)을 권장, 원생 모두가 적게는 68만원에서 많게는 6백여만원까지 저금하고 있다 한다.

 또한 짝짓기에 힘써 모두 16쌍을 결혼시킨 결과 백마디의 말보다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는데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이들만을 수용할 별도의 집단촌을 조성하겠다고 또 다른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그렇게 좋은 결혼을 원장님은 왜 안하시죠?”

 “내새끼 돌보며 남의 새끼 도울수 없죠”라며 4대독자인 老총각 白원장은 환하게 웃는다.

 그대로 구김없는 白髮童顔(백발동안)이다.

 “언제 어떤 동기에서 이런일에 뜻을 두셨나요?”

 “30여년전 6.25사변후부터지요. 그 전란에서 7식구중 모친과 저만이 살아남은 충격적인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神학교 3학년때 학업을 중단하고 사망자와 행려병자들이 널려있는 거리로 나섰지요. 손수 무연고 사체를 묻어주고, 몸소 행려병자들의 거러지왕초가 되어 구걸행각으로 얻은 밥으로 그들을 먹였죠. 지극히 작은자와 최후의 심판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인간생활을 통해서 보여준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다시 말해서 ‘行動하는 信仰’만이 산신앙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보람있던 일이라면 무엇인가요?”

 “자신에게는 세속적인 욕망을 떨쳐 버리고 알몸인체로 감사하는 삶을 누릴수 있는거죠. 그리고 원생들에게서는 잠재 自活능력이 개발되고 특히 디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늘을 우러러 볼때는 눈물겹도록 기쁨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으시다면?”

 “수도원을 창설, 어려운 분들과 아픔을 함께하면서 이대로 변함없이 살다가 지상의 나그네 생활을 맺는 것이죠”

 진정 마음을 비운 白원장의 삶을 보면서 오늘의 우리 사회도 절망만이 아닌 희망찬 큰빛줄기가 흐르고 있음을 본다. 
  

 배기창 記
 김재춘 옮김
 1989년 1월22일자 

 *1989년1월15일자는 자료 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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