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뽕짝
어쨌거나 뽕짝
  • 박수서 시인
  • 승인 2020.06.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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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4>

 1993년 봄 대학에 들어갔고 제법 큰 강의실에서 국문과 선배, 조교, 교수들이 바둑판처럼 모여 앉아 신입생 인사를 받는 자리였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작두 위에 오르는 무당처럼 다짜고짜 노래를 불렀다. 쟈니리의‘뜨거운 안녕’이었다. 이제 막 스물의 새파랗게 어른 새내기가 60년대 뽕짝을 불렀으니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선배들은 물론 조교조차 무슨 노래인지 모르는 듯했다. 허나 구성진 콧소리와 바르르 떨리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에 만족한 표정은 분명했다. 그 후 인문대 앞 잔디밭에서, 대학로 학사주점에서, 자취촌 놀이터 모래장에서 낮밤 없이 술에 취한 날은 종종 뽕짝이 울려 퍼졌다.

  생각해 보면 나의 뽕짝 사랑은 어린 날부터 시작됐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이라고는 도랑밖에 없고 천지가 논밭인 벽골제 옆 김제평야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 등하굣길에 노래를 부르며 가방의 무게를 줄였다. 라디오에서 몇 번 들은 노래는 받아쓰기처럼 곧잘 따라 불렀다. 최헌의‘오동잎’과‘앵두’를 부르며 키 작은 소년이 강아지풀을 꺾어 논두렁을 걷는 풍경이 아직도 환하다.

  황금벌판 김제에서 서학동으로 이사를 하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전주에서 학교에 다녔다. 전주여상 옆 중학교에 다니던 때 음악 실기 시험 시간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몰아쉬고 복식호흡으로 영혼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한창 부르고 있는데 선생님이“그만, 다시”음... 음... 목을 가다듬고 전보다 더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그만, 장난하지 말고 다시”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빙그르르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입술을 다잡고 또다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바로 그때“그만, 너 왜 자꾸 장난해? 왜 가곡을 뽕짝으로 불러!”선생님의 미사일이 떨어졌다. 그때 알았다. 나의 발성은 천부적 뽕필이었던 것이다. 어찌 철없는 사춘기 시절이다지만 신성한 가곡을 쿵짝쿵짝 뽕짝으로 부르려 했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숨길 수 없는 음색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기점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5월 축제 날 명자꽃색 드레스를 입고 아름답게 여장을 하고 심수봉의‘미워요’를 모창했다. 마침 실습나온 교생 몇몇은 넋이 나갔고 느글거리는 치즈를 통째로 먹은 표정으로 원망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세 번째 시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을 출간할 때 발문을 쓴 박제영 형은 트로트의 서정과 운율이 도드라지는‘뽕짝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나의 시에 명명해 줬다. 하다못해 이제 시까지 뽕짝으로 가는구나 생각하다 되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에서 뽕짝을 지울 수 없다면 뽕짝과 함께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시를 쓰는 일이나 뽕짝을 부르는 일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다 세상의 말을 아픔, 슬픔, 기쁨이란 활자나 악보로 옮기는 일인걸.

  간절하게 사랑해 본 사람은 알리라. 밤새 내리는 빗소리도 당신의 숨소리처럼 아득하고 바람에 날리는 후박나무 이파리조차 핏줄처럼 아팠을 일, 사랑만큼 시와 노래에 질질 끌려다니는 감초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성향도 따라 흐르고 뭔가 맞는 풍에 익숙해진다 “당신 가수 누구 좋아해?”라고 누가 물으면, 그전 같으면 나훈아, 남진, 송창식, 조영남, 송대관...... 너무 많아서 어물거릴 것을, 지금은 두어 명 정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가수는 진시몬이다. 일찍이 발라드라는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무대를 워킹하다, 얼마나 불편했으면 기어이 스스로 맞는 옷을 찾아 입고 활동하는 뽕짝 가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나는 진시몬과 외모가 퍽 닮았다. 얼굴의 형태도 비슷하다. 그리하여 비슷한 하관(下顴)이어서인지 꽤 음색도 비슷하다. 한때‘진시몽’이라는 모창 가수를 해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다음은 조승구이다. 널리 알려진‘꽃바람 여인’이란 노래도 있지만 나는‘구멍 난 가슴’에 빠져있다. 노래할 자리가 있으면 꼭 이 노래는 빼놓지 않고 부른다. 앞서 말한 간절한 사랑에 대하여 이토록 시적으로 표현한 뽕짝은 없다.“미치도록 사랑했던 그 사람이여/ 내 몸속에 같이 살던 그 사람이여/ 당신 떠난 후/ 당신 떠난 후/ 구멍 난 내 가슴은 너무 아파요”어찌 보면 유치찬란한 가사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랑의 아픔을 이토록 미치도록 표현한 가사도 없다.“내 몸속에 같이 살던 그 사람”이란 표현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에 시로 박히지 않은가. 나는 가끔 오래된 술집의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반짝이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미치도록 노래 부르는 뽕짝 시인을 상상해 본다.

 

 글 = 박수서 시인

 

 ◆박수서

 전북 김제 출생. 2003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등단. 시집『갱년기 영애씨』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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