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른다
  • 김성철 시인
  • 승인 2020.06.09 1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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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3>

 비가 왔었다. 아니 비가 안 왔었다. 아니다 비가 온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안 온 것 같기도 하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즈음이었고 나는 그 해 고입고사를 봤다. 시험을 앞둔 아침, 지금은 노모가 된 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학교에 입장해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발걸음은 무거웠고 왁자지껄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지금은 이유도 떠오르지 않지만, 어머님께 미안함이 앞섰고 시험을 앞두고 괜한 오기를 부렸나 싶은 후회를 했던 것 같다.

 

 느릿느릿 학교 정문을 나서자 누나가 서 있었다. 누이는 고맙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앞서 걸었다. 누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익산역 앞, 새서울악기사였다. 누이는 고2였고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사춘기 소년이었다.

 중3였던 나는 음악을 몰랐다. 라디오조차 들을 줄 몰랐다. 그런 내게 누이는 수많은 카세트테이프와 LP판 앞으로 이끌었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머뭇거림도 없이 장발의 사내들이 그려진 음반을 골랐다. 4명 구성원 모두가 장발이었고 얼굴 생김새는 거칠었다. 지금은 전설이 된 록그룹 ‘들국화’였다. ‘행진’을 밤새 들었고, ‘그것 만이 내세상’을 흥얼거렸다. 어디 그뿐이랴. ‘매일 그대와’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도 하다못해 마지막 트랙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듣고 듣고 또 들었다.

 

 20대가 되었고 나는 자원입대를 했다. 입대를 한 곳에서는 뛰고 노래 부르고 또 뛰고 노래를 불렀다. 밤마다 선임병에게 이끌려 왼손과 오른손으로 발걸음을 대신하며 군가를 배우고 또 배웠다. 구보하다가 부르는 노래를 틀려서는 안 되었다. 대중가요에 군인의 상황을 붙인 노래였다. 뽕짝도 있었고 누구나 흔히 아는 노래도 있었다. 변형된 가사는 잔인하기도 했으며 욕망도 잔뜩 품고 있었다.

 제대한 후 만취가 되거나 군대 친구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흥얼흥얼 갈지자 발걸음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20대 초중반, 군대에서 배운 군가가 빵빠레처럼 아니 혀꼬임에 구슬퍼져 슬프고도 아련한 뽕짝처럼 흐를 때도 있었다.

 

 20대를 넘기고 서른이 지나서면서 음악의 취향이 변모했다. 록 위주의 음악과 강렬한 전자기타와 속 시원한 드럼의 선율이 좋았던 시절이 끝나버린 셈. 나만 알고 있는 그룹의 노래와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노래에서 벗어나 발라드를 듣고 댄스음악에 어깨도 흔들거리게 되었다. 음악적 취향의 변모와 동시에 삶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말 없고 수줍음이 많고 때론 전자기타 혹은 드럼처럼 날카롭던 것들이 툴툴 털리고 이 사람 저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게 되었다. 사랑할 때는 밝고 경쾌한 노래가 좋았고, 이별한 뒤엔 구슬픈 노래가 좋았다. 장르적 구분도 없었다. 상황에 맞게 모든 노래를 즐겨 들었다. 운전하면서도 거리를 걸으면서도 음악을 귀에 꽂고 살았다.

 

 40을 넘기자 어느 순간 음악을 듣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운전 중에도 걷는 중에도 집에 들어와 혼자 멍하게 있는 순간에도 음악은 없었다. 보지 않는 TV 속 말소리만이 집 구석구석을 떠돌고 있었다. 오늘이 중요했고 내일이 중요했다. 일이 우선이고 나라는 자아는 안중에 없는 생활을 살고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고2 누나가 사준 들국화를 찾았고 모아온 LP판을 찾았다. 집구석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없었다. 내일이 되어 일하는 와중에도 들국화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와 그룹과 음악의 안부가 궁금해서 좌불안석이었다.

 

 그날, 퇴근 후 나는 곧장 어머니 댁으로 차를 몰았고 외출 중이던 어머니를 기어이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둘러 내 방 구석구석을 뒤지던 끝에 그들을 찾았다. 켜켜이 쌓아둔 잡동사니 뒤, 오래된 책장 구석에 일렬로 고스란히 꽂혀있는 그들. 표지 속, 그들은 여전히 젊었고 예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성기판을 뱅뱅 돌며 누구는 악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슬픔을 머금고 울 듯이 구슬프게 불렀다. 10대부터 40대까지의 내가 오래된 엄마의 집에서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고 갑자기 젊어진 엄마가 소리 높여 잔소리 중이었다. 귀가 환하지고 늙은 노모가 환해지고 내 유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내일까지 환해지고 있었다.

 

 글 = 김성철 시인

 

 ◆김성철

 200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이 기우는 비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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