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왕궁터 추정 전주 인봉리 제대로 발굴하자
후백제 왕궁터 추정 전주 인봉리 제대로 발굴하자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0.05.2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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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자존시대 연다> 10) 후백제의 도읍 전주

전주 동고산성-후백제 역동적 문화유산 입증
사찰터·산성 초기청자 발굴 역사성 입증 필요
후백제의 왕궁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전주시 중노송동 인봉리.
후백제의 왕궁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전주시 중노송동 인봉리.

 후백제(後百濟)는 서기 892년(신라 진성여왕 6년)에 백제 부흥운동을 시작으로 900년 견훤이 완산주(完山州·오늘날의 전주시)를 도읍으로 삼아 건국한 나라이다. 공식 국호는 백제이나 이전에 존재했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後百濟)로 통용되며 신라, 고려와 더불어 후삼국 중 하나였다. 이러한 후백제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긴 채 역사속으로 사라지며 역사와 문화유산은 왜곡되게 서술되고 존재감이 사장되어 왔다. 가야에서 백제를 거쳐 후백제로 이어지는 역사속에서 사장되고 왜곡된 유·무형의 고귀한 문화자산들을 발굴하고 존재감을 각인시켜 주는 게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다행히 관련 분야에 대한 학술토론과 발굴이 다양하게 펼쳐지며 진정한 전북인의 정신과 자존감을 찾아줄 것으로 기대한다.

 

 #후백제와 산성

서기 900년 견훤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뒤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라고 칭하고 백제의 계승과 신라의 타도를 선언했다. 후백제가 936년 고려에 멸망할때까지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37년의 짧은 역사였지만 문화유산은 참으로 역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곽장근 군산대학교 교수는 후백제의 역동적 문화유산을 전주 동고산성을 비롯 장수 합미산성·칙령산성에서 찾는다. 전주 승암산을 한 바퀴 휘감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을 가지고 대부분 줄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성돌은 마치 옥수수 낱알 모양으로 그 끝이 상당히 길어 견치석(犬齒石)으로도 불린다. 성벽의 뒤쪽에는 성돌과 뒤채움석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기다란 돌로 채웠다. 고려 말 전주성을 쌓으면서 성돌 대부분이 반출되었지만 후백제 산성의 비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장수 합미산성·칙령산성을 중심으로 전주 동고산성과 축성기술이 거의 똑같은 많은 산성들이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을 따라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후백제의 산성 혹은 절터에서 초기청자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이목을 끄는 대목이다.

 

 #후백제 반월형 도성

 한 나라의 도성이란 국가의 상징인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행정의 중심지 내성인 궁성과 외성인 나성을 갖춘 형태를 일컫는다. 지금까지는 후백제 앙궁터를 찾는 데에만 큰 관심을 두어 후백제 도읍으로서 후백제 도성의 복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일제강점기때 편찬된 ‘전주부사’에 실린 견훤 성터를 대상으로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한 뒤 전주시 노송동 일대를 휘감은 반월형 산줄기를 후백제 도성으로 했다. 곽장근 교수가 후백제 도성을 복원한 것에 따르면 승암산 북동쪽 기린봉 정상부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려 인봉리 동쪽 마당재를 지나 솔대백이 부근에서 그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서낭댕이를 거쳐 여단터인 반대산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 남서쪽으로는 기린봉에서 승암산을 지나 전주천을 건넌 뒤 전주 남고산성을 휘감았다. 이러한 도성은 그 펴면 형태가 거의 반월형에 가깝고 승암산과 기린봉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평지를 아우르는 평산성이다.

 

 #인봉리는 후백제 왕궁터였을까?

 지금까지 후백제 왕궁터를 찾기위한 노력과 함께 여러 주장이 무성했다. 후백제 왕궁터와 관련하여 전주 동고산성설과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등이 있다. 최근에는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가 새로 등장했다. 인봉리 일대에 왕궁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평면 형태는 동쪽이 길고 서쪽이 짧은 사다리 모양이다. 인봉리 일대 발굴조사는 2015년에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동쪽 담장에 대해 실시,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구와 기와들이 확인되었다. 이어 실시된 시굴조사에서 목책이나 망루와 같은 성벽시설 같은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볼수 있었으며 점토 성토층, 해자 등은 성벽 유구로서 왕궁터였음을 입증해 가고 있다.

 

 # 견훤의 탁월한 선택 전주

 견훤은 백제의 부활 영역을 무진주, 전주, 공주로 선정한 가운데 전주를 중심으로 잡았다는 점과 전주의 대외적인 교통로를 만경강과 줄포만을 활용할 수 점이 탁월함을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완산백제의 망향으로 백제인 정신과 사상이 강하게 깃들인 곳이 전주이다. 백제의 정신과 사상은 미륵신앙이었고 미륵신앙 발원지가 바로 익산이었다. 견훤은 미륵신앙 추앙자였다. 익산이 배게 미륵신앙 발원지라면 미륵신앙 종착지는 전주이다.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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