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의 입구, 수탈의 출구 ‘군산·이리’
침략의 입구, 수탈의 출구 ‘군산·이리’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5.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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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 <2>

■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다(農者天下之大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는 전통시대 농업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통시대 농업 생산력은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흉년이 닥치면 수많은 백성들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고, 연이은 기근(基根)은 국가를 피폐(疲弊)한 상태로 몰고 갔다.

 과거 한국농업의 특징은 다품종 소량재배에 있었다. 기업적 영농보다는 가족 단위 소농(小農)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까지도 풍년과 흉년은 기후조건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 가지 작물만 재배하는 것은 마치 ‘계란을 한 바구니에 모으는 것처럼’ 위험성이 큰 도박이었다.

 가족의 일년 생계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작물의 재배가 이뤄졌다. 또 다른 특징은 논농사에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한자 ‘논 답(沓)’자는 직관적으로 밭(田) 위에 물(水)이 들어찬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논농사는 이앙법(移秧法), 곧 모내기를 통한 모종의 옮겨심기가 핵심이다.

 이앙법에 의한 재배는 쌀의 생산량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밭에 씨를 뿌리는 직파법과 비교해 제초를 위한 일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이르면 전국적인 농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모내기철에 가뭄이 들면 일년 농사를 망치는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은 모내기를 금지하기도 했었다.

 논농사와 모내기가 일반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모내기철에 제때 물을 댈 수 있는 수리시설에 대한 요구와 정비가 이어졌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김제 벽골제와 같은 시설이 그것이다. 조선팔도에서 새롭게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정비해 농지 면적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 일제 농업침략의 첨병, ‘일본인 대농장과 수리조합’

 1905년의 을사조약, 이후 1910년의 경술국치를 전후해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한편으로는 서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 각지였다. 서울에서 정치적 이권을 확보하고 전국 각지의 경제적 침투를 위함이었다.

 일본인들은 1899년 군산의 개항 직후 주로 떠돌이 행상이나 미곡무역을 수행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들은 소규모로 토지를 매입하거나, 적극적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통해 저당잡은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나갔다. 일본인들이 오늘날 군산에 편입된 옥구(沃溝)와 지금의 이리지역을 중심으로 농토에 눈독을 들였다.

 전라북도 금강 이남과 노령산맥, 이북의 장장 남북 200리, 동서 120리에 달하는 넓은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전남지역과 더불어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했다.

 왕실 소유의 토지인 궁방전(宮房田), 군량을 충당하는 둔토(屯土) 등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던 장소였다. 하지만 바다에 가까운 만경강 하류지역은 서해의 영향을 받아 강수량이 적고, 범람의 피해가 잦아 황무지와 미개척지 비율이 높았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니 땅값이 싼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싼값의 논을 대량 매입하기 시작했다. 대개는 수리시설이 부재한 천수답이었다. 만약 이 논들에 물을 댈 수 있게 하고, 강물과 바닷물의 범람을 막을 제방을 설치한다면 광범위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군산항을 통한 무역의 용이함과 미래 개발가치를 보고 농지를 매입한 것이다. 그래서 옥구, 익산 지역에서는 1911년까지 옥구서부, 임익(臨益), 임익남부(臨益南部), 전익(全益), 임옥(臨沃) 5개의 수리조합을 설립했다. 1917년까지 전국에 14개의 수리조합이 설립된 것을 감안하면, 이 지역이 상당한 관심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리조합은 한국의 전통적인 계와는 다른, 일본에서 수입된 모델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조선총독부, 금융자본과 결탁해 대규모의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수리조합은 조선조 이래 사용해 오던 저수지들을 활용하고 새로운 제방의 수축사업과 간척사업을 병행했다.

 임익남부수리조합은 만경강 연안의 토지에 물을 대기 위해 만경강 상류에는 둑을 쌓고, 하류에는 방조제와 하천제방을 만들었다. 김제 광활면 일대의 간척사업이 좋은 예시다. 1925년 결성한 동진(東津)수리조합은 일본 오사카의 재벌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郞)가 대규모 자본을 투입했다.

 10㎞에 달하는 제방을 쌓고, 7년 대공사를 거쳐 약 540만평의 농지를 확보했다. 그렇게 확보된 간척지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소금기를 빼는 제염(製鹽)작업을 했다. 제염작업은 물을 넣었다가 빼는 물일, 대나무 통을 밭에 박아 염분을 지하로 내보내는 등 가혹한 노동의 반복을 요구했다. 한겨울에도 물일을 해야 하는 농민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 대농장-수리조합-농업학교 ‘삼위일체’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은 옥구, 이리지역의 대지주로 군림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대농장의 운영을 통해 확보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의 다양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호남선 거점역으로서 이리역을 유치한 것은 이들 농장주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금마, 군산, 전주가 강력한 경쟁자로 경합하던 상황에서 전혀 새로운 이리가 떠오른 것은 그러한 이유다. 이리역 유치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이리번영조합을 거점으로 다시 한번 이리농림학교 성립청원을 주도한다. 오하시 농장의 주인 오하시 요이치(大橋與市), 간사 오기 오네츠케(扇米助) 등이 그들이다.

 1922년 개교한 이리농림학교는 전국 유일의 갑종 실업학교였다. 학생의 모집도 전국단위로 실시했으며, 전국 13도 도청에서 입학시험이 치러졌다. 첫 번째 입학시험을 거쳐 1학년 50명, 을종 실업학교에서 2년제 과정을 수료한 54명을 선발했다. 입학정원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1:1 비율로 했다.

 이리농림학교는 당시 최첨단 설비와 뛰어난 교사(敎師)를 갖추고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했다. 매년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1934년 기준 6%의 입학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리농림학교 졸업생들은 치열한 경쟁과 입학 당시의 뿌듯함을 회고한다.

 심종섭(이리농림학교 임과 11회)씨는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마음 한구석에 장차 큰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상급학교 진학을 결심하고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 바로 이리농림학교였으며, 당시의 이리농림학교의 명성은 전국에 떨쳐 있어 이 학교에 입학만 하게 되면, 천하의 수재인 것처럼 의기양양했고,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했다”고 회고했다.

 이리농림학교 설치를 통해 전라북도 지역은 일본인 대농장과 대농장의 관개(灌漑)를 담당하는 수리조합, 선진 농업기술의 실습과 전파를 담당한 농업학교의 삼위일체가 완성되며 소위 한반도의 ‘농업 스테이션’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농업 스테이션’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양쪽으로 가기 편리한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풍부한 곡창지대의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의 전북대학교 특성화캠퍼스에 남아 있는 붉은색 벽돌 건물은 과거 이리농림학교의 축산과 건물로,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 효율적 수탈 위해 항만·철도 건설

 고종 36년(1899) 여섯 번째로 개항한 군산항의 일제시기 주요 취급 품목은 80% 이상을 차지한 미곡(米穀)이었다. 군산항의 수출액은 1903년 742,766원에서 1928년에는 44,193,575원으로 무려 58배나 급증했다.

 내륙 농촌 지역으로부터 철도를 통해 집결된 미곡은 군산항을 통해 수출됐으며 수출량은 전남 목포의 2배를 상회했다.

 1933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쌀의 20.5%가 군산항을 경유할 정도였다. 군산의 주요 거래선은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와 고베였다.

 한반도에서 유출된 쌀은 57%를 차지하는 오사카·고베를 뒤이어 도쿄와 요코하마가 16%, 시모노세키 4%, 나고야 3% 순으로 입항되었다.

 이렇게 일본에 유입된 쌀은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한신공업지대 저임금노동의 기초였다고 평가된다.

 전라북도 지역의 산물이 군산으로 집결하게 첫 번째 통로는 전주-군산간 도로였다. 전주-군산간(전군도로)도로는 1907년 5월 대한제국 시기에 공사를 시작해 1908년 10월 공사를 마무리 짓고 개통됐다.

 전군도로는 전주에서 시작해 동산촌, 대장촌, 목천포, 대야를 거쳐 군산으로 향했는데, 이 경로는 옥구, 이리지역의 일본인 대농장들을 경유했다. 두 번째 통로인 철도는, 1912년 호남선 이리역 개통, 1914년 전라선 부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다.

 이리를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세로로는 서울-대전-이리-목포의 축선이, 가로로는 전주-이리-군산 십자 모양의 철도망이 완성된 것이다. 전라북도 교통망의 점진적인 완성은 이리(현재 익산)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 ‘산미증식계획’ 수탈계획의 다른 이름, 농민의 농지이탈

 1920년대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시작한다. 산미증식계획 이란 쌀의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것인데, 계획을 통해 늘어난 쌀들을 일본으로 수입해 일본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 사업과 농사개량 사업의 두 측면으로 이뤄졌다. 토지개량 사업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수리조합을 이용한 관개(灌漑) 개선이 주요 골자이고, 농사개량사업은 이리농림학교를 통한 선진농법의 도입이다.

 일본인 대농장과 수리조합, 이리농림학교의 ‘농업 스테이션’이 완비된 전라북도 지역은 ‘산미증식계획’의 제1호 실험지였다.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한반도의 쌀 생산량은 1915~1919년간 1,312만석에서 1935~1939년간 2,129만석으로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인다.

 그러나 연평균 이출량(移出量)은 그보다 더한 성장세를 보인다. 1915~1919년간 16.7%였던 일본으로의 이출량은 1935~1939년에 이르면 46.1%에 달했다.

 한반도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국내의 쌀 소비량은 격감하게 되어, 한국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지은 쌀 대신 만주로부터 수입된 좁쌀을 주식으로 삼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수리조합에 속한 농민의 경우, 초기에는 1/3의 소작료를 부담했다. 그것은 조선후기 전북지역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대지주들은 각종 농사비용을 조합비 명목으로 농민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 1915년 소작료는 생산량의 50%에 달했고, 1927년에 이르러서는 70~80%에 달하게 된다.

 허울 좋게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됐지만 농민들의 손에 남는 것은 오히려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대지주들의 토지겸병이 가속화 되는 가운데, 전북지역 농민들은 하나둘씩 정든 고향을 떠났다.
 

 <인터뷰> 원광대학교 HK+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이용범 교수 “관광유산으로 탈바꿈한 식민지 유적들”

 원광대학교 HK+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이용범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옛날 옥구와 이리, 지금의 익산과 군산지역에는 일제시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전 익산문화재단이 입주해 있었던 건물은 익옥수리조합 사무소와 창고 건물이었고, 지금은 호남관세박물관이된 (옛)군산세관, 지금은 근대건축관으로 탈바꿈한 (옛)조선은행 군산지점 같은 건물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오늘날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탈이라는 일제시기 역사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가 단위의 경제지표만 바라보는 일부 학자들은 식민지시기 근대화가 이뤄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지표는 힘들게 농사지은 수확물을 빼앗기고, 끝내는 자신의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져 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올바른 역사 인식이 필요합니다.”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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