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잔향
베토벤의 잔향
  • 김자연 아동문학가
  • 승인 2020.05.12 17: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9>

 오랜만에 베토벤 교향곡을 듣는다. 잔잔하게 향기롭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나는 방에 들어가 베토벤 교향곡을 1시간 넘게 듣는 버릇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5번 <운명>을 제일 많이 듣는다. 교향곡 <운명>을 몇 번 들으면 신기하게도 축축했던 마음이 어느새 고실고실 해진다. 평소 음악에 남다른 조예가 있어 교향곡을 즐겨 왔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버릇이 교향곡 사랑에 대한 나이테를 만들어 놓았다. 벌써 40년 넘게 이어져 온 나만의 특별한 시간이다. 내게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고 정서적 탄력성을 심어준 소중한 음악이다.

 음악에 관한 추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새로 사 온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 노래에서부터였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늘 전축을 틀어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온 집안을 물결치게 했다. 때때로 대문 옆 화장실까지 노랫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통기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나 <별이 빛나는 밤> 방송에 나오는 노래가 아니라 모두 아버지 취향에 맞는 노래들이라 내심 불만이 있어도 내색할 수 없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취미 앞에 나는 그저 순응하며 따라갈 수밖에 없는 어린 양일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에도 <울고 넘는 박달재>, <미아리 고개>, <동백 아가씨>, <여자의 일생> 등 그 당시 대중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들을 동요 <과수원 길>, <반달>보다 먼저 머리에 꽃피웠다. 지금도 가끔 나도 몰래 흘러간 대중가요 가사들이 불쑥불쑥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내가 클래식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때로 기억된다. 뭔가 좋지 않은 일로 어깨가 축 처져 남문 앞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다. 남문 악기점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통학하면서 이 주변을 지날 때면 간간이 아름다운 선율에 잠시 귀를 적시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발을 멈추고 귀를 세웠던 적은 드물었다. 물결처럼 잔잔히 흐르다 다시 휘몰아치는 웅장한 선율이 우울한 기분을 말끔히 쓸어내렸다. 나도 몰래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마력적인 그 선율을 들었다. 그 후 친구랑 같이 다시 남문 악기점을 지나다 그 음악이 베토벤 교향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곡에 관심을 보이자 음악광이었던 친구는 베토벤 교향곡 테이프를 사서 나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베토벤 음악에 관심도 없었고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다만 뭔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나 갈등이 생겼을 때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베토벤 교향곡을 들었을 뿐이다. 이후 그런 버릇이 계속 이어졌다. 베토벤 <운명>을 반복적으로 열 번을 들을 때도 있었다.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음악! 차차 베토벤 교향곡을 듣는 시간이 늘어났고 관심을 부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새삼 지난날의 베토벤 음악을 추억해 볼 수 있어 행복하다. 마음이 불안정할 때면 나는 지금도 베토벤 교향곡을 듣는다. 볼륨을 크게 틀고 베토벤 음악을 들으면 세찬 소나기에 마음이 말끔히 씻기는 느낌이다. 교향곡의 상쾌한 잔향이 마치 오월의 신록 같다. 베토벤 교향곡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베토벤 음악과 함께 삶에 여유라는 아름다운 꽃씨를 뿌려 나가고 싶다. 예쁘게 익어갈 것이다.

 

 글 = 김자연 아동문학가

 ◆김자연

 문학박사. 동화창작연구소, ‘리더의 글쓰기’ 진행. 전북동화사랑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