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원
어느 정원
  • 최정호 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 승인 2020.05.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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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병원에 근무하시던 한 선배님이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어 환송회를 했다.

 대자인 병원에 근무하시는 분 중 나이가 많은 의사의 모임이 있는데 이름이 NIH이다.

 NIH는 ‘노인회’ 줄임 말을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완산구 우목실로 가는 길은 이른 퇴근시간이라 그럭저럭 막히지 않고 술술 잘 빠졌다. 모악산 산자락으로 접어들며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선생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르게 오신 분들이 집주인의 안내를 받아 귀를 기울이며,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집주인의 친절한 설명은 어떻게 이런 집에 이사를 올 결심을 했는지, 한적하며 공기가 좋고, 전망이 있는 집을 선택한 이유부터, 모악산이 보이는 앞마당에서 살구나무를 이사시키고 단풍나무로 교체한 실용적 이유까지 이어진다. 산딸나무의 꽃받침처럼 보이는 흰빛 꽃턱잎이 봄이 되면 작은 꽃을 가운데 두고 나온다는 특징도 설명해 주신다. 나중에 서재에 가득한 신학에 관한 책과 잡지 등을 보고나니 이 집 곳곳에 산딸나무가 무성한 이유가 설명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때ㅤ 쓰인 이 나무는 꽃턱잎의 모양이 십자가를 닮아 기독교인들이 신성시하는 나무이다 (구글에서)

 어린 시절부터 내가 경험한 집의 정원은 뒷마당의 채소밭 혹은 부잣집의 잔디가 깔린 넓은 바비큐 시설 정도라 함께 방문하신 신경외과 선배님 표현대로 ‘소담’스러운 정원과 화실, 넓지 않지만, 한없이 깊은 거실에서 고아한 품격이 향기처럼 은은하게 스며온다. 2층으로 올라가니 신학과 인문학에 관한 서적이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단색의 적당한 크기의 책상과 컴퓨터에는 부지런한 연구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평소 병원 복도에서 목례를 드리는 정도의 관계를 맺은 선생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외교적 미소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분하고, 경건한 집안에서의 생활이 부여한 성스럽고 우아한 분위기의 페르소나라 짐작이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를 보거나, 기암괴석과 절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표현은 ‘아름답다’ ‘감동적이다’ ‘경이롭다’ 등등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대상에 대한 감탄 형용사의 나열이다. 섬머셋 몸은 이를 명화의 비평가가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할 말이 없으므로 화가의 경력이나 화풍, 그림의 내력 등 아름다운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에 부과되는 평가나 역사 얘기를 첨가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름답고 그윽한 이 정원과 고아한 집안의 풍경은 이러한 수식어로 만족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그 무엇이 있다. 정원에 존재하는 다종다양의 나무와 풀 그리고 꽃들은 그 자체로 나에게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만, 그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너머서는 차라리 숭고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 느낌은 무엇인가? “우목실 정원과 주택은 거주자의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에서 세계를 담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처럼 나에게 어제 보았던 우목실 정원과 주택은 거주자와 사용자의 삶과 세계가 진한 냄새의 감각으로 나에게 침입해 온다. 그 정원과 집은 거주자와 정원사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내게 들어온다.

 일본식도 아니고 전통 한국식도 아닌 인공과 자연의 소박한 섞임이 넘실대는 아기자기한 정원이 주는 울림과 편안함과 정갈함이 교차하는 거실과 서재가 어울려 거주자의 성(聖)스러움 속에 속(俗)이 은폐되어 아쉬움을 있으나 서재와 복도에 보이는 ‘신학’과 기독교 간행물에서 나는 거주자의 세속적 욕망이 ‘신학’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안주인이 그린 이국적 풍경화는 전통 폴랑드르의 풍경화가를 넘어서는 세밀함이 감탄스럽다. 하지만 화가의 감정이입을 느낄 수 없음은 아쉬웠다. 아니 그곳 세계에서 욕망은 보이지 않는다. 번뇌는 보이지 않고, 해탈은 공허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닌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 하지 않은가? 오묘한 도(道)는 늘 변화 속에 있구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른 聖人의 초옥이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프렌체스카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성자(聖子)의 수도원 같은 그곳에 물의 소리와 향기가 있었다면 나는 깊은 산, 높은 하늘, 맑은 물, 자연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다.

 최정호<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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