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에 산다] (5) 전북 무용촌 대표...高光容(고광용)씨
[보람에 산다] (5) 전북 무용촌 대표...高光容(고광용)씨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5.18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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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傷者(전상자) 21가구에 새로운 삶

 “추위에 떨어 본 사람이라야 햇빛의 따스함을 안다. 인생의 고뇌를 겪은 사람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안다”

 악목탕는 전쟁의 死地에서 입은 상처로 불구의 몸이 된 ‘역전의 용사’들이 한 곳에 보여 의지와 집념의 살믈 별쳐가는 국가유공자마을 전북 무용촌(전주시 원동 592-20) 두눈실명 6명, 두다리절단 2명, 반신불수 1명 등 18명의 전상자와 3명의 미망인 등 21세대가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두눈을 잃은 불구의 몸이지만 일할 능력이 미약한 전상용사들을 모아 자립기반을 구축해온 마을대표자 高光容씨(고광용·57).

 그는 1948년 18세의어린나이로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 전쟁의 포성이 온누리를 진동시키던 51년 5월 강원도 대관령전투에서 중공군의 포탄에 두눈과 오른손을 잃었다.

 “1급전상자로 명예제대할 당시에는 보훈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회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고 당시를 술회하는 그는 수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한 수녀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한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체의 일부만을 가져가는 대신 하나뿐인 귀중한 목숨을 그대로 남겨주신 하늘에 감사한다”며 자신들의 처지보다 못한 사람들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가지 않느냐며 반문한다.

 그는 “육체의 눈은 보지 못하나 정신적인 눈은 볼 수 있다”고 역설하고 1954년 두눈실명전상자 400명을 대상으로 자립을 위한 광명원(光明院)을 설립, 실의에 빠져있던 상이용사들의재활의 길을 연다.

 1968년 7월 고향인 전주로 돌아온 그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북지역 전상용사를 규합하여 1969년 11월 완주군 조촌면에 집단촌을 건립, 자립·자활의 길을 모색한다.

 비탄과 절망을 느낄 여유가 없을 만큼 열심히 일한 결과 집단촌 입주 당시 소규모이던 양돈사업이 10년만에 500마리의 돼지와 5천평의 사료부지를 갖는 대규모 농장으로 성장했다.

 1979년 10월 집단촌 중심부로 산업도로가 개설되게 되자 부득이 전주시 원동으로 집단이주, 축산사업장, 회관, 주택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全北武勇村(전북무용촌)을 설립했다.

 또한 1984년 12월 이리시 신흥동 이리공업단지내에 대지 3천명, 건물 1천평 규모의 전선류 생산업체인 和白(화백)물산주식회사를 창립했다.

 和白물산은 전기통신공사에 통신케이블을, 한국전력공사에 절연전선류를 수의계약으로 납품함으로써 작년도 생산실적이 45억원에 달했고, 금년도 목표액 50억원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광용씨는 全北武勇村의 공동사업을 성공시켜 국가유공자의 후생복지에 힘쓰고 지방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8회 道民의 章 산업장을 수상한 바 있다.

 全北武勇村 21세대 124명은 ‘남보다 앞서가자’는 생활신조로 정상인 보다 더욱 강인한 정신력과 집념으로 제2의 삶을 개척하고 있다.

 
 이상엽 記
 김재춘 옮김
 1988년 12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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