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
[기획] 경술국치 11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
  • 익산=김현주 기자
  • 승인 2020.05.0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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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광대학교 HK+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7년부터 인문한국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경계를 넘어, 마음을 열고, 공동의 시장을 개척하자’라는 비전으로 한국·중국·일본·러시아 등 동북아시아지역의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이동과 삶의 경험을 역사, 문화, 도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연구단은 전북도민의 역사적 경험이 인문 한국사업에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며, 최근 ‘만주에 이주한 전라북도 사람들의 정착과 귀환’이라는 연구성과를 돌출했다.

 이에, 전북도민일보는 지역민의 삶과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원광대학교 HK+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의 취지에 적극 공감하며 ‘경술국치 100년, 만주로 간 전북인들과 그들의 삶’을 매월 2회, 총 10회에 걸쳐 지면을 통해 연재한다.

 원광대학교 김주용 교수를 비롯한 필진은 이번 보도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식민지시기 전북인들의 삶과 이동, 한국사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들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며,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하고 있다.

 ▲집필진:김주용 교수, 이용범 연구교수, 박성호 연구교수, 이명진 연구원, 이석형 연구원

<제1회>만주의 잊혀진 전북인들을 찾아서

 2020년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해이다. 만주에서 제국 일본군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이 두 전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홍범도와 김좌진” 같은 독립군 장군을 거론할 것이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봤을 때, 평안남도와 충청남도 출신이다. 그렇다면 이 전투에 참여한 전라북도 출신의 독립군은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북로군정서 간부를 지냈던 고평(高平)이나 서로군정서의 주요 인물이었던 강한년(康翰年) 등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전라북도에 거주하면서 이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소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뿐만이 아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安圖)현에는 전북촌, 정읍촌, 무주촌의 지명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강제 이주 당했던 전라북도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 역시 기억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전북인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던 만주로 왜 이주하였을까. 그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1876년 조선의 개항과 제국 일본이 전라북도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조선의 개항과 전라북도의 ‘존재’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반도에도 열강의 활동이 공식화된다. 이러한 가운데 전라북도는 제국 일본이 농업생산의 보고로 파악하였던 곳이다.

 드넓은 평야와 항구가 갖춰진 전라북도는 ‘수탈의 최적지’였던 셈이다. 전라도는 1895년 전주·남원·나주·제주에 4개부가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1896년 13도 행정체제로 개편할 당시 노령산맥을 경계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뉜다.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는 목포항과 군산항의 개항을 전후해 제국 일본의 수탈창구가 된다. 일제는 전라도의 풍부한 식량자원과 해양자원을 침탈하기 위해 호남선과 전라선 철도를 부설하고 국도 1호선과 국도 2호선을 설치한다. 일제의 침탈에 전라도인은 강하게 저항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이 대표적인 예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반제반봉건의 깃발 아래 전북에서 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결국 농민군의 항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3.1운동 등 민족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는 면에서 주목받는다.

 제국 일본은 식량의 보고인 전라도에서 침탈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이에 전라도 의병은 곳곳에서 일제에 저항한다. 전라도 의병은 일제의 한반도 침탈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에, 일제는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의병이 상당 부분 학살되거나 강제노역을 당한다. 체포된 의병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진 국도 2호선을 일명 ‘폭도도로’로 부르기도 한다. 의병을 탄압한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을 단행한다. 이른바 경술국치다.

 제국 일본은 식량의 자급화를 목적으로 군산항을 개항하면서 1908년 군산-전주간 도로를 포장한다.

 이는 호남평야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수탈하기 위함이다. 한반도의 곡창지대였던 전라북도는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는 수탈의 ‘화수분’이었던 셈이다.

 ▲한인들은 만주로 왜 갔을까?

 만주지역으로의 한인 이주 물결은 1869년 함경도 한재(旱災)로 시작된다. 만주지역 한인 이주는 19세기말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몇 가지 이주형태로 나타났다.

 한인의 초기 이주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렸지만,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을 계기로 정치적인 망명 등이 더해져서 그 수는 급속하게 증가한다. 더욱이 1919년 3월 1일 거대한 민족적 독립선언은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해외로 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정도이다.

 20세기 초 일제의 신속한 만주로의 ‘진출’은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가운데 절대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이주한인은 처절한 생존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만주국 건국 이전 한인의 만주 이주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초기 이주는 조선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따른 생활의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1910년 전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식민지 경제재편을 통한 박탈감과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처럼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은 만주로 한인 이주를 가속화 시켰다.

 만주지역 한인 이주(移住)의 역사는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구분된다. 한인 이주의 자율과 통제라는 계선(契線)이 형성되는데 만주사변이 작용한다. 만주사변 이전 한인 이주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외연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자유의지를 토대로 한 개인 이주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한인 이주의 패턴은 개인 이주와 집단이주가 혼합된 형태로 진행된다. 이처럼 1931년 9월 18일에 일어난 만주사변은 제국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실행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 이듬해 만주국이 세워졌으며, 14년간 제국 일본이 통치한다. 오늘날 중국이 9월 18일을 국치일로 기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도 만주국은 해방 후 한국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작은 예이지만 학교에서 ‘국민체조’라고 하는 것은 만주국 ‘건국체조’를 소위 벤치마킹한 것이다.

 ▲만주로 강제이주한 전북인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강제이주’는 1937년 10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의 한인 이주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제이주’ 연구도 이 지역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전 세계 한민족(조선)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700여만 명이다.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원형은 불과 100여년전에 형성된 것이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이주공동체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들이 강제 이주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관동군의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성립된 만주국은 건국이념을 협화(協和)로 내세우면서 그 반대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기술을 선보인다.

 항일세력을 제거하고자, 이른바 치안숙정을 실시한다. ‘안전농촌’의 탄생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만주사변, 만주국 성립 과정에서 파생된 안전농촌의 설립은 한인에게는 또 다른 울타리 형태의 강제성이다. 안전농촌을 ‘안전’하게 세운 일제로서는 ‘치안의 담보’와 수탈의 가속화를 함께 추진할 수 있게 된다. 그 중심에 이주 한인이 존재한다.

 만주국 성립으로 일본인 이민이 급증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에 일제는 1934년 제1차 이민회의를 개최하고 농·어 이민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이민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에 들어간다.

 1935년 7월 만주척식주식회사와 만주이민협회를 통해 10개년 100만호 500만명 일본인 이주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일본인 이민은 ‘이주비’의 과다 계상으로 재정적 부담이 가중할 것이라는 반대여론을 뒤로하고 추진된다. 만주국에서 야마토(大和)민족이 식민통치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피압박 민족의 항일역량을 제어하기 위해서 일본인의 대량 이민은 절대적이라는 인식이 투영된 계획이다.

 하지만, 1937년부터 1941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실질적인 일본인 이주 호수는 42,000여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1933년부터 추진하던 한인 집단부락 설치는 북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탄력을 받아 진행된다. ‘안전농촌’의 설치가 강제성의 초기 단계라면 ‘집단부락’은 본격적 궤도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전북인은 집단마을 설립의 선봉대로 동원된다. 만주국에서는 ‘개척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토성을 쌓는다. 이주민은 이곳에서 감옥에서 지내는 것과 같은 생활을 영위한다.

 경제공동체의 완성을 통해 전시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던 만주국은 ‘오족협화’를 내세워 이주 한인들을 통제한다. 통제와 감시의 선결 조건은 강제성이다. 강제이주 된 전북인은 해방과 동시에 정착과 귀환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지금의 연변자치주 안도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의 대부분은 만주국의 강제이주 정책의 산물이다.

 원광대학교 김주용 교수(문학박사·역사학)는 “지난해 안도현에서 만주지역 어르신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나의 고향이 솜리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그분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해방 후 태어난 ‘해방둥이’조차,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땅에서 살았던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김주용 교수는 “한국 근현대사가 겪은 질곡(桎梏)의 격랑(激浪) 속에서 고단한 이주를 강요당했던 전라북도인의 상당수는 해방 후 귀환하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公民)이자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들은 말로 다 못한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 전라북도에서 만주로 강요당해 이주해 지금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생하게 전했다.

 익산=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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