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증유의 혼란을 성찰해야 할 때
미증유의 혼란을 성찰해야 할 때
  • 이흥래
  • 승인 2020.05.03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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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첫 확진자가 발생한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인한 미증유의 혼란이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루 수백 명이었던 확진자 수가 요즘은 한자릿수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외국에서 유입된 확진자가 많아 우리 사회의 걱정은 많이 줄어들고 있는 듯합니다. 신록이 무르익는 산하마다 그동안 갇혀 있었던 이들의 발길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답게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활기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확진자가 수백만에 이르고 사망자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만큼 우리도 사회적 격리나 방역활동을 소홀히 한다면 다시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이런 마당에 코로나 바이러스 19사태가 가져온 우리 사회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규정한다는 게 다소 부박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국토를 붉게 물들여갈 때 불현듯 떠올랐던 말은 바로 ‘성찰(省察)’이었습니다. 무엇때문에 이런 바이러스가 생겼는지, 또 이 바이러스 사태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지 같은 거창한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을 형편은 못되지만 이 성찰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만은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위기와 혼돈의 사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떠올려 보곤 했습니다. 아마도 가족과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의 면면들 그리고 우리가 지녀야 할 건전한 사고와 생활양식의 변화 등등을 말입니다. 얼마전 미국 로키산맥의 산불을 진화하다 숨진 산불진화대원들의 실화를 다룬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Only the Brave, 오직 용기뿐!)를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무섭도록 번져오는 산불 속에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지켜내면서 수시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다 끝내 불길 속에서 산화한 진화대장 마쉬는 생전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죽을 때 필요 없어도 되는 것은 무엇인지?’ 진정 가장 중요한 것만 챙기기에도 부족한 세상에서 마쉬의 지적은 쉽게 공감이 올 수 있었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코로나 사태 발생 이후 앞으로의 세상은 코로나 사태 발생 전(B.C)과 발생 후(A.C)로 구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세계의 변화가 그만큼 크고, 달라져야 한다는 그런 의미겠지요.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켜온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은 물론 환경과 산업구조 등 모든 면에서 세상은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바이러스는 벌써 새로운 환경과 가치관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동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던 자연이 그 짧은 시간사이에 자리를 되찾고 있고, 공해로 찌들었던 하늘은 파란색을 되찾고 있습니다. 향락산업의 무분별한 성장이 진정 인류를 살리는 생산활동은 아니라는 자각도 다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같은 변화를 목도하면서 바이러스의 내습이 꼭 자연의 저주만이 아닌, 성찰의 기회를 지적하는 경고라는 해석도 많은 듯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온 풍요로움이 정말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뤄져 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도 많아진 듯합니다. 그런데도 다시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과거의 악순환으로 되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물론 인류가 이뤄온 온갖 발전상과 그 속에서 누려온 혜택까지를 깡그리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주장마저 현학적인 공론으로 치부돼 버린다면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며칠 전, 온 국민을 코로나 공포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31번 확진자가 무려 67일간의 치료끝에 퇴원했다고 합니다. 이 31번 환자의 맹활약(?)으로 바이러스가 엄청나게 창궐하면서 한때 우리나라는 전 세계가 교류를 금지할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 가운데 기저질환이 없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는 곧 사회적 거리 두기나 방역에만 주의했으면 그만큼 국가적 피해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종교들은 이같은 사회적 합의를 무시함으로써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비단 그 종교뿐만이겠습니까. 대명천지 이런 세상에도 여전히 혹세무민하는 종교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농담이지만 우리나라에 하느님급은 몇 명이고 예수님급도 수십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종교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불행한 사태가 또 다시 되풀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 역시 코로나 사태가 들려준 귀중한 교훈입니다.

 이흥래<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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